자, 이제부터 공연은 시작이야! <br>그녀들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 연극 <공연은 지금부터>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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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시각장애인들의 연극 공연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라고 했다. 무식함의 소치인지는 몰라도, 시각장애인들의 연극이 세계 어디에선가 이미 공연된 적이 있었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청각 장애인들이 음악 연주회를 열었다든지, 악성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도 9번 교향악을 작곡하고 지휘까지 한 것까지도 알고 있으면서, 왜 시각장애인들이 연극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까? 장애인의 현실을 인식하는 나의 시야가 매우 협소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무거워진 하늘이 곧 비를 뿌릴 것 같은 이른 저녁, 공연 장소인 ‘성균소극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한참 벗어난 오프 오프 대학로, 그 비주류의 공간에 소극장이 있었다. 크고 화려한 간판들을 지나 겨우 찾은 공연장 입구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느새 분위기는 공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장애인 방송모니터단의 S씨다. 입장이 시작되고,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그는 스태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동휠체어를 옆 건물 복도에 세워두고 스태프들이 그를 업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힘은 들었지만 다행히 지하 공연장 객석에 가장 좋은 앞자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2005년이던가, S씨를 처음 만난 곳이 서울시청사 앞이었는데. 장애인의 청계천 접근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장애인 시위대 중에 그가 있었다. (물론 그때의 투쟁으로 현재 청계천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평소 장애인들의 문화 향유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그도 연극 관람은 처음이라 했다. 뜻밖이다. 그만큼 문화 공간에 대한 장애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소극장의 경우 대부분 지하에 있고, 공간이 협소해 접근이 더 어렵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이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주최 측의 고민을…. 모든 황무지에서 첫 삽은 늘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암담한 현실에 지지 않고, 무대 위에서 스스로 드러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녀들의 힘이다. 그 간절한 표현의 욕망이다. 이창동의 영화 <시>에서 치매를 눈앞에 둔 노년의 주인공 미자가 현실에 발 딛고자 하는 자기 표현의 욕망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 연극 <공연은 지금부터>의 그녀들도 목소리로 몸짓으로 얼굴 표정으로 자신의 욕망을 맘껏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직도 예술을 여가의 한 부분이나 잉여의 쾌락 정도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들에게 연극 <공연은 지금부터>를 단 일부분이라도 보여 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도 예술이 생존권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즉, 이 연극에는 표현을 통해 자기 존재의 뿌리를 긍정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편안하게 안방에 앉아 TV채널이나 돌리는 문화 소비자의 수동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문화를 주체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사람들의 열정이 <공연은…>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연극에서 스스로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녀들의 유쾌한 생존 비법이기도 할 테니까.
<공연은 지금부터>는 시각장애 여성 5명이 뮤지컬<시카고>를 오디션에서부터 무대에 올리기까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말하고 노래하고 무엇보다 느낌이 충만한 그녀들, 뮤지컬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이면서,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속내를 슬쩍 슬쩍 내비친다. 그 내비침의 방식은 독백으로, 질투와 시기심의 화법으로 드러나는데, 의외로 긴장감이 있다. 극중 그녀들의 아픈 사연이 실제 그녀들이 걸어온 길과 겹치기 때문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짧은 훈련 기간 동안 벌어진 그녀들의 실제 이야기가 대본에 담겨져 있다고 한다.
솔직히 우리가 시각장애인들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저 머리로만 느끼는 피상적인 이해였다. 그러나 이 연극을 보면, 무대 위의 저 인물이 실제로 시각장애를 겪고 있다는 절절한 현실감이 밀려오면서, 머릿속으로만 느끼는 합리적 이해와는 많이 다른,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적 이해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정서적 감동과 공감대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이 연극은 강력 추천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이 시각장애 여성들의 연극 공연은 우리에게 정서적 감동과는 구별되는 냉철한 각성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장애는 죄가 아니야, 너의 편견, 너의 시선, 언젠가는 바뀌게 될 거야.” 연극 <공연은…> 속의 뮤지컬 <시카고>에서 이 코러스의 당당한 외침은 계속 반복되며 흐른다. 장애인에 대한 쓸데없는 연민이나 무책임한 동정이란 이제 그만 두라는 외침이며, 이제 자신들도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을 통해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연극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 즉 새로운 각성이고 깨우침이다.
연극 <공연은 이제부터>는 관객에게 여러 가지 차원의 감상 층위를 만족시킨다. 우선 시청각적 즐거움을 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공연은 이제부터>의 노래는 활력이 넘쳤고, 김미옥 씨의 좌충우돌은 무대를 휘젓기에 충분했다. 인상적인 몇 장면, 전인옥 씨와 박정화 씨의 이중창 ‘추억’에서 울려나오는 자신감의 표출, 특히 박정화 씨의 성량은 시원했다.
놀라운 것은 무대를 압도하는 배우들의 힘이 겨우 2주 동안의 연습만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모두 전문 배우는 아닐 텐데 말이다. 극단은 4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연극과 친해지는 시간을 기 시작했고, 김미옥 씨를 제외하고는 연극이 뭔지도 모르는 초보들이라니 여러 가지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명의 주인공 외에도 활동보조인 역할을 맡은 뇌병변의 장애를 갖고 있는 원영숙 씨도 전문 배우이고, 뒤에서 반주를 맡은 김혜성 씨는 실제로 여러 연극무대에서 음악과 연주를 담당하고 있어 연극에서처럼 실제로도 늘 바쁘단다.
물론 45분간의 짧은 이야기가 완결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좀 아쉬움을 줄 수도 있겠다. <공연은 이제부터>가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흡족한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갈등과 시기가 화해로 마무리되는 과정이 배우들의 마음을 느낀 관객들에게 어떤 충족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난 후, 대학로 거리에는 세찬 비가 퍼붓고 있었다. 연극을 선택한 그녀들의 욕망이 나는 궁금해졌다. 장애를 딛고 일정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 준 사람들의 사례를 우리는 물론 많이 알고 있다. 두 팔이 없는 상태에서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 화가도 있고, 불편한 손으로 감동적 선율을 전달하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그러나 이 장애인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예술적 완성품을 스스로 향유할 수 있는 행운을 갖고 있지 않는가? 그에 비해 연극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작품 텍스트로부터 소외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스스로 볼 수 없는 몸짓으로, 표정으로, 그녀들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문득 관객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연기를 풀어내던 그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 그녀들은 소통을 즐긴 것이다. 관객들의 숨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되, 시각장애를 가진 그녀들만이 느낄 수 있는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근원적인 충만함을 맛보았으리라.
어렵게 만든 시각장애 여성들의 연극 <공연은 지금부터>가 제목과는 반대로 단 2회 공연으로 끝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동안 이 연극을 무대 위에 올리기까지의 어려움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들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연기를 다시 한 번 무대 위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곧 아침 오네, 생명 새롭게 펼쳐지는 찬란한 그 인생을 양보할 수 없어~ 나를 위해~”를 노래하던 그녀들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작성자배경미 필름 너머서 영화보기 진행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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