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애인의 독백 그리고 넋두리 ②
[짧은 이야기]
본문
복지는 보이지 않고 복지부동만 판을 치는 세상이로다.
장애여부와 관계없이 똑같은 사람이기에 누구든 인권을 침해해서도 안 되고, 침해당해서도 안 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애써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애인들의 인권이 마구 유린되고 차별의 벽이 높게 쳐진 뒤틀린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장애인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장애인먼저’, ‘장애인을 사랑하자’는 말잔치 이젠 듣기도 싫고 역겹고 구역질난다.
도움을 준다는 동정의 말도 시끄럽다. 불쌍하다는 말은 더더욱 듣기 거북하다.
다만 있는 그대로 놔두고 봐 달라.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피맺힌 장애인들의 절규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온전한 사회가 될 것이다.
장애인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짓뭉개지만 않으면 그냥 저냥 살아갈 수 있다. 장애인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교를 찾아가면 여러 잔말 늘어놓지 말고 능력이 인정되면 그냥 받아주면 된다.
장애인들이 공연이 보고 싶어서 찾아갈 때 구차하게 들어주고 밀어주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생색내기용 수고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집에서 공연장으로 가는 길과 공연장 출입문을 국가예산을 퍼부어 일부러 가로막는 심통만 부리지 않는다면 서로 피곤하게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
장애인들이 먹고살려고 취업을 원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취업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말고, 능력대로 일할 수 있도록 취업의 길을 열어주면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린다.
비장애인들처럼 높은 산, 등산로까지 편의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무리하게 보채지도 않았다. 놀부 심보를 발동, 멀쩡한 길거리를 가로막고 높은 턱을 설치하는 공사에 예산을 들여서 꼭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정부로부터 듣고 싶을 뿐이다.
종교에 묻겠다.
신부나 승려 등 구도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장애인들이 문을 두드릴 때, 전생 등 가당치 않는 괴변을 들이대어 성직자로 가는 길을 얼씬도 못하도록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그는 인연마술은 무슨 연유로 부리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다.
스님과 신부님에게 묻고 싶은 것은, 신체장애와 능력 장애를 동일시한다는 것인지, 그에 대한 알량한 답변을 듣고 싶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처럼, 신체장애는 능력 장애와 별개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리라.
인간이 지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악은 뭐니뭐니 해도 인종차별, 성차별, 신분차별, 차별이 으뜸일 것이리라. 그중 신체에 대한 차별의 높은 악마의 벽을 철거하는 지름길은, 장애인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 믿는다.
가을을 수놓는 형형색색 코스모스 꽃은 작거나 크거나 차별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향기를 품어냄으로써 더욱 곱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보인다.
봄, 여름을 피한 채 겨울문턱에 한발을 내밀려는,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잘 어울리는 코스모스 꽃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에 대해 깊고 넓게, 사고의 영역을 펼쳐나가기를 원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빛깔로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무지개도 각기 다른 색깔로 어울려 환상적인 고운 빛으로 다가오듯, 좌우바퀴로 굴러가야 수레가 잘 굴러가듯 좌우 날개 짓으로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무지개 일곱 빛 모두가 서로 시기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아껴줄 때, 또한 좌우 바퀴 서로가 인정해주고 사랑하면서 함께 굴러갈 때, 좌우 날개 짓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푸른 창공을 힘차게 날아갈 때, 무명이 쳐놓은 차별의 벽은 우르르 허물어질 것이라 믿는다.
차별의 벽이 허물어지면 갈등, 불신, 대립, 원망, 미움, 싸움 등도 모두 허물어져 우리가 바라고 갈망하는 더불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가 성큼 다가오고, 드디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랑의 숲이 우거질 것이라 확신한다.
응어리가 켜켜이 쌓여 한을 만드는데, 한을 털어 내는 유일한 길은 한을 한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을 극복하여 뛰어넘는 것이로되, 시각장애인이 한을 극복하는 길은 좌절과 체념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한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두 눈 대신 마음에 눈 영혼의 눈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 여겨진다.
장애를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은 한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어리석은 짓이다.
장애를 장애로 품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쓰라린 상처를 딛고 영롱한 아름다운 진주로 키우는 조개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을 극복하는 교훈을 찾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응어리를 키우며 한에 파묻혀 사는 사람에겐 소망도 희망도 없다.
상처를 진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를 지닌 조개처럼 한을 극복하는 사람에겐 행복과 기쁨이라는 큰 선물을 얻게 되고, 진주보다 더욱 영롱한 찬란한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으리라.
한을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한다고 피력하면서도 장애인 복지가 전무하고, 편견에 울고 차별에 짓밟히는 장애인 현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흥분만 될 뿐 어디서부터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지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찻잔 속에 태풍으로 머무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사력을 다해 잃어버린 권리를 찾는 ‘행복 찾기 운동’을 끈질기게 펼칠 때 얻을 수 있으리라.
장애인들은 승려와 신부가 될 수 없단다.
개떡이나 쳐 먹으면서 생사의 해탈을 찾고, 쑥떡이나 게걸스럽게 쳐 먹으면서 이웃사랑과 자비를 지껄여라.
오호라, 말잔치에 이골이 난 여우같은 말재간꾼들이여!
잘못된 것은 남김없이 몽땅 묶어서 장애인 탓으로 돌리거라.
멍에의 족쇄와 굴레의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데, 차별의 두루마기를 입고 편견의 모자를 쓰고 휘청거리는데, 고통의 사슬과 슬픔의 멍울을 품고 살아가는데, 그까짓 ‘내 탓이오’ 라는 물 혹 하나 덤으로 못 받아 주겠는가?
달리기 보물찾기 경쟁에서 왕창 거두어들인 자가 어찌어찌 계기가 되어 장애인들에게 인심을 쓰는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정치권진입을 위해 벌린 쇼였고, 장애인 팔아 먹고사는 사이비 사회사업가 수작이로구나.
예수 팔아먹고, 부처 팔아먹고, 가난한 사람 팔아먹고, 고아 팔아먹고, 노인 분들 팔아먹고, 정신 질환자 팔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장애인까지 들먹거리며 사랑 빠진 정의를 팔아먹는구나.
이제 팔려나가는 대상이 되는 것도 진저리 쳐지고 신물이 넘어온다.
소꼬리 삼년 고아먹으려고 덤벼드는 위선자들이여!
아직도 더 못 팔아먹어 안달을 쳐대며 두리번거리는가.
보물찾기 달리기 경쟁이 벌어지는 이 땅위에선, 장애인들은 뛰나마나 언제나 꼴찌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 문제를 자본의 논리로, 힘의 논리로, 경쟁의 논리로, 동정과 시혜의 논리로, 말잔치로 이어지는 사랑 없는 정의의 논리로 백날을 펼쳐보아도, 천 날을 외쳐보아라.
장애인 인권은 강 건너 부지 하 세월이고, 장애인 노동 권리는 산 넘어 첩첩산중이고, 장애인 이동권리는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장애인 문화소외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두루뭉술 넘어간다.
빈대 간을 빼먹을 얌체족들 거동을 보라. 두 발 두 손 묶어 놓은 채 치사한 달리기경쟁에서 탈락한 장애인들과 부모 때려죽인 철천지원수라도 진 냥, 장애인 주차장에 차대가리 디밀고 들어선 족속들 얌체통 머리를 보라.
어쩌면 하나같이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자들로 재수 한 바가지로구나.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위대한 성직자들에게 한 마디 하겠다.
내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신으로부터 아직도 벌을 받지 않는 신기함 때문이다.
성경책 속에 갇혀있는 사랑은 결코 사랑일 수 없다.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웃들 손에 쥐어지지 않는 나눔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나눔이고 나눔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다.
예수가 이 땅위에 오신 것은 성경 속에 사랑을 가두어 놓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땅 끝까지 이르러 사랑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이리라.
예수가 전하는 땅 끝이란, 우리가 사는 해남 땅 끝 마을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겪고 있는 곳을 땅 끝이라 이른다.
함께 나눔은 사랑이고 이러한 사랑은 예수가 선포한 불변의 진리다.
불경 책 속에 틀어 박혀있는 자비는 더 이상 자비일 수 없다.
허기진 가난한 이웃들의 뱃속에 채워주지 않는 나눔은 더 이상 자비라 할 수 없다.
자비는 비움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부처님정신을 이 땅위에 무소유를 심는 것이다.
비움은 자비이고 자비는 부처님의 정신인 불변의 진리이다.
부처와 예수가 전해준 불변의 진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성직자 혓바닥에 진리가 숨어있는가?
성경, 불경 책 속에 갇혀있는가?
기도원, 산사에 머리 틀어박혀 있는가 조직폭력배들의 주먹 안에 쥐어져 있는가?
정치권력자들의 권력 따먹기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있는가?
신자들 귓구멍에 머물러 있는가?
언론인들 펜대에 주눅 들어 있는가?
지식인들 머리통에 쑤셔 박혀있는가?
종교학자들 간사한 학문에 달라붙어 있는가?
예술인들 명예와 인기 욕에 눈이 멀어 길을 잃고 있는가?
국민주머니 털어 해외로 자본을 빼돌린 재벌들 돈 바람에 날라 갔는가?
망국적인 지역감정 깊은 골에 매장이라도 됐단 말인가?
미술관 액자에 고이 모셔졌단 말인가?
헐벗고 굶주림으로 잊어버렸다는 말인가?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소, 유치장에 구속이라도 됐단 말인가?
불변의 진리는 도대체 누가 목 졸라 죽였단 말인가?
액자 속에, 책 속에, 갇혀 숨이 막혀 질식사 당했단 말인가?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언론인들의 펜촉에 찔림 당해 죽었단 말인가?
성직자 혓바닥 끝에 매달리다 추락사 당했단 말인가?
권력에 눈먼 지식인들 가슴과 머리통 속에서 압살 당했단 말인가?
명예, 권력, 인기, 자본에 허기진 작가들 심보 속에 짓눌려 죽었단 말인가?
불변의 진리가 어디에서 질식당해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봤는가?
불변의 진리란, 진리 따로, 현실 따로, 겉도는 것이 아니다.
우는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병들어 신음하는 자, 차별과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슬피 우는 가난한 장애인 등 소외된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사랑이 깃 든 정의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진정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불변의 진리이리라.
불변의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믿는다.
자유란 진리를 외치는 자의 몫이로되, 진리를 외치기는커녕 도리어 책 속에 액자 속에 가두어 두려는 자에겐 결코 자유를 누릴 자격도 특권도 없다.
자유란 가만히 있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과 멸시를 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가는 이 땅위에 5백만 장애인들은 뜻과 힘을 모아 한 목소리로 힘차게 진리를 외쳐야 한다.
진리는 외치면 외칠수록 커지는 것이고, 진리가 커지면 마침내 모든 이들에게 참 자유의 선물을 얻게 되리라.
진리가 갇혀 자유에 목말라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야윈 얼굴로 떨리는 손으로 진리를 달라고 하는데, 진리를 선포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진리에 족쇄 채우고 펜 끝에, 혓바닥 끝에 놀리고 있다.
진리가 포위된 살벌한 이 땅위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자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진리가 어둠 속에 갇혀있는 삭막한 이 땅위에선, 구석을 샅샅이 뒤져도 자유는 찾기 어렵다.
진리가 명예와 부를 채우는 상품으로 전락되는 더러운 이 땅위에선, 분쟁, 다툼, 이기주의, 갈등, 대립, 죽음의 긴 그림자만 드리워질 뿐이다.
눈물을 흘리며 뜬눈으로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몸부림치고 있을 나의 진정한 친구 장애인들이여!
나 먼저 죽거들랑 조사나 멋지게 써주게나.
이제 가네, 이제 가네, 나 이제 떠나가네.
목발잡고 절룩거리던 다리 이 세상에 모두 던져놓고 나 이제 눈물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놀림 받았던 아픈 다리, 더러운 세상에 묻어두고, 나 이제 고통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차별과 편견의 어둠속에서 두렵고 겁에 질려 치를 떨어야 했던, 실명한 두 눈, 뒤틀려 휘청거리던 몸뚱어리, 강한 자만 살아남아 차치고 포치는 송장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불공평한 세상, 놀림 받고 차별에 진저리 친 육신 모두 내려놓고, 나 이제, 차별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장애는 슬픔이고, 고통이고, 엄청 불편한 것이라고, 마지막 떠나는 길에 마지막 진실을 털어놓고 떠나가네.
무시와 소외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더러운 세상, 나 비록 경쟁에서 밀려나 서러움에 겨워 울었으나, 쓰고, 맵고, 달고, 시큼한 비빔냉면 먹는 맛을 보며, 세상 구석구석 못 볼 놈, 볼 놈, 두루두루 만나보고, 잘 놀고, 잘 지내고, 인생경험 골지게하고 떠나가네.
장애인들이여!
내 저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에 하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애는 엄청 고통이고, 무지 슬픔이고, 견디기 벅찬 것이고, 피 눈물 나게 불편하다고, 가감 없이 모두 털어놓을 참이네.
이철용
전국회의원, <꼬방동네사람들>, <어둠의 자식> 등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장애여부와 관계없이 똑같은 사람이기에 누구든 인권을 침해해서도 안 되고, 침해당해서도 안 된다는 자명한 진리를 애써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장애인들의 인권이 마구 유린되고 차별의 벽이 높게 쳐진 뒤틀린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동의하는 것만으로도, 장애인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장애인먼저’, ‘장애인을 사랑하자’는 말잔치 이젠 듣기도 싫고 역겹고 구역질난다.
도움을 준다는 동정의 말도 시끄럽다. 불쌍하다는 말은 더더욱 듣기 거북하다.
다만 있는 그대로 놔두고 봐 달라.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피맺힌 장애인들의 절규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온전한 사회가 될 것이다.
장애인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짓뭉개지만 않으면 그냥 저냥 살아갈 수 있다. 장애인들이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교를 찾아가면 여러 잔말 늘어놓지 말고 능력이 인정되면 그냥 받아주면 된다.
장애인들이 공연이 보고 싶어서 찾아갈 때 구차하게 들어주고 밀어주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생색내기용 수고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집에서 공연장으로 가는 길과 공연장 출입문을 국가예산을 퍼부어 일부러 가로막는 심통만 부리지 않는다면 서로 피곤하게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
장애인들이 먹고살려고 취업을 원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취업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말고, 능력대로 일할 수 있도록 취업의 길을 열어주면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린다.
비장애인들처럼 높은 산, 등산로까지 편의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무리하게 보채지도 않았다. 놀부 심보를 발동, 멀쩡한 길거리를 가로막고 높은 턱을 설치하는 공사에 예산을 들여서 꼭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정부로부터 듣고 싶을 뿐이다.
종교에 묻겠다.
신부나 승려 등 구도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 장애인들이 문을 두드릴 때, 전생 등 가당치 않는 괴변을 들이대어 성직자로 가는 길을 얼씬도 못하도록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그는 인연마술은 무슨 연유로 부리는지, 상식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다.
스님과 신부님에게 묻고 싶은 것은, 신체장애와 능력 장애를 동일시한다는 것인지, 그에 대한 알량한 답변을 듣고 싶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처럼, 신체장애는 능력 장애와 별개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리라.
인간이 지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악은 뭐니뭐니 해도 인종차별, 성차별, 신분차별, 차별이 으뜸일 것이리라. 그중 신체에 대한 차별의 높은 악마의 벽을 철거하는 지름길은, 장애인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 믿는다.
가을을 수놓는 형형색색 코스모스 꽃은 작거나 크거나 차별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향기를 품어냄으로써 더욱 곱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보인다.
봄, 여름을 피한 채 겨울문턱에 한발을 내밀려는, 높고 푸른 가을하늘과 잘 어울리는 코스모스 꽃을 보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에 대해 깊고 넓게, 사고의 영역을 펼쳐나가기를 원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빛깔로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무지개도 각기 다른 색깔로 어울려 환상적인 고운 빛으로 다가오듯, 좌우바퀴로 굴러가야 수레가 잘 굴러가듯 좌우 날개 짓으로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무지개 일곱 빛 모두가 서로 시기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아껴줄 때, 또한 좌우 바퀴 서로가 인정해주고 사랑하면서 함께 굴러갈 때, 좌우 날개 짓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푸른 창공을 힘차게 날아갈 때, 무명이 쳐놓은 차별의 벽은 우르르 허물어질 것이라 믿는다.
차별의 벽이 허물어지면 갈등, 불신, 대립, 원망, 미움, 싸움 등도 모두 허물어져 우리가 바라고 갈망하는 더불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가 성큼 다가오고, 드디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랑의 숲이 우거질 것이라 확신한다.
응어리가 켜켜이 쌓여 한을 만드는데, 한을 털어 내는 유일한 길은 한을 한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을 극복하여 뛰어넘는 것이로되, 시각장애인이 한을 극복하는 길은 좌절과 체념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한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두 눈 대신 마음에 눈 영혼의 눈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 여겨진다.
장애를 마음 속에 담아두는 것은 한을 눈덩이처럼 키우는 어리석은 짓이다.
장애를 장애로 품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쓰라린 상처를 딛고 영롱한 아름다운 진주로 키우는 조개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을 극복하는 교훈을 찾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응어리를 키우며 한에 파묻혀 사는 사람에겐 소망도 희망도 없다.
상처를 진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를 지닌 조개처럼 한을 극복하는 사람에겐 행복과 기쁨이라는 큰 선물을 얻게 되고, 진주보다 더욱 영롱한 찬란한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으리라.
한을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한다고 피력하면서도 장애인 복지가 전무하고, 편견에 울고 차별에 짓밟히는 장애인 현실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흥분만 될 뿐 어디서부터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지 무척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찻잔 속에 태풍으로 머무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사력을 다해 잃어버린 권리를 찾는 ‘행복 찾기 운동’을 끈질기게 펼칠 때 얻을 수 있으리라.
장애인들은 승려와 신부가 될 수 없단다.
개떡이나 쳐 먹으면서 생사의 해탈을 찾고, 쑥떡이나 게걸스럽게 쳐 먹으면서 이웃사랑과 자비를 지껄여라.
오호라, 말잔치에 이골이 난 여우같은 말재간꾼들이여!
잘못된 것은 남김없이 몽땅 묶어서 장애인 탓으로 돌리거라.
멍에의 족쇄와 굴레의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데, 차별의 두루마기를 입고 편견의 모자를 쓰고 휘청거리는데, 고통의 사슬과 슬픔의 멍울을 품고 살아가는데, 그까짓 ‘내 탓이오’ 라는 물 혹 하나 덤으로 못 받아 주겠는가?
달리기 보물찾기 경쟁에서 왕창 거두어들인 자가 어찌어찌 계기가 되어 장애인들에게 인심을 쓰는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정치권진입을 위해 벌린 쇼였고, 장애인 팔아 먹고사는 사이비 사회사업가 수작이로구나.
예수 팔아먹고, 부처 팔아먹고, 가난한 사람 팔아먹고, 고아 팔아먹고, 노인 분들 팔아먹고, 정신 질환자 팔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장애인까지 들먹거리며 사랑 빠진 정의를 팔아먹는구나.
이제 팔려나가는 대상이 되는 것도 진저리 쳐지고 신물이 넘어온다.
소꼬리 삼년 고아먹으려고 덤벼드는 위선자들이여!
아직도 더 못 팔아먹어 안달을 쳐대며 두리번거리는가.
보물찾기 달리기 경쟁이 벌어지는 이 땅위에선, 장애인들은 뛰나마나 언제나 꼴찌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 문제를 자본의 논리로, 힘의 논리로, 경쟁의 논리로, 동정과 시혜의 논리로, 말잔치로 이어지는 사랑 없는 정의의 논리로 백날을 펼쳐보아도, 천 날을 외쳐보아라.
장애인 인권은 강 건너 부지 하 세월이고, 장애인 노동 권리는 산 넘어 첩첩산중이고, 장애인 이동권리는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장애인 문화소외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두루뭉술 넘어간다.
빈대 간을 빼먹을 얌체족들 거동을 보라. 두 발 두 손 묶어 놓은 채 치사한 달리기경쟁에서 탈락한 장애인들과 부모 때려죽인 철천지원수라도 진 냥, 장애인 주차장에 차대가리 디밀고 들어선 족속들 얌체통 머리를 보라.
어쩌면 하나같이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자들로 재수 한 바가지로구나.
기독교, 불교, 천주교 위대한 성직자들에게 한 마디 하겠다.
내가 말하는 위대함이란, 신으로부터 아직도 벌을 받지 않는 신기함 때문이다.
성경책 속에 갇혀있는 사랑은 결코 사랑일 수 없다.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웃들 손에 쥐어지지 않는 나눔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나눔이고 나눔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다.
예수가 이 땅위에 오신 것은 성경 속에 사랑을 가두어 놓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땅 끝까지 이르러 사랑의 씨앗을 심기 위해서이리라.
예수가 전하는 땅 끝이란, 우리가 사는 해남 땅 끝 마을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겪고 있는 곳을 땅 끝이라 이른다.
함께 나눔은 사랑이고 이러한 사랑은 예수가 선포한 불변의 진리다.
불경 책 속에 틀어 박혀있는 자비는 더 이상 자비일 수 없다.
허기진 가난한 이웃들의 뱃속에 채워주지 않는 나눔은 더 이상 자비라 할 수 없다.
자비는 비움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부처님정신을 이 땅위에 무소유를 심는 것이다.
비움은 자비이고 자비는 부처님의 정신인 불변의 진리이다.
부처와 예수가 전해준 불변의 진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성직자 혓바닥에 진리가 숨어있는가?
성경, 불경 책 속에 갇혀있는가?
기도원, 산사에 머리 틀어박혀 있는가 조직폭력배들의 주먹 안에 쥐어져 있는가?
정치권력자들의 권력 따먹기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있는가?
신자들 귓구멍에 머물러 있는가?
언론인들 펜대에 주눅 들어 있는가?
지식인들 머리통에 쑤셔 박혀있는가?
종교학자들 간사한 학문에 달라붙어 있는가?
예술인들 명예와 인기 욕에 눈이 멀어 길을 잃고 있는가?
국민주머니 털어 해외로 자본을 빼돌린 재벌들 돈 바람에 날라 갔는가?
망국적인 지역감정 깊은 골에 매장이라도 됐단 말인가?
미술관 액자에 고이 모셔졌단 말인가?
헐벗고 굶주림으로 잊어버렸다는 말인가?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소, 유치장에 구속이라도 됐단 말인가?
불변의 진리는 도대체 누가 목 졸라 죽였단 말인가?
액자 속에, 책 속에, 갇혀 숨이 막혀 질식사 당했단 말인가?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언론인들의 펜촉에 찔림 당해 죽었단 말인가?
성직자 혓바닥 끝에 매달리다 추락사 당했단 말인가?
권력에 눈먼 지식인들 가슴과 머리통 속에서 압살 당했단 말인가?
명예, 권력, 인기, 자본에 허기진 작가들 심보 속에 짓눌려 죽었단 말인가?
불변의 진리가 어디에서 질식당해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봤는가?
불변의 진리란, 진리 따로, 현실 따로, 겉도는 것이 아니다.
우는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병들어 신음하는 자, 차별과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슬피 우는 가난한 장애인 등 소외된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사랑이 깃 든 정의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진정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불변의 진리이리라.
불변의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믿는다.
자유란 진리를 외치는 자의 몫이로되, 진리를 외치기는커녕 도리어 책 속에 액자 속에 가두어 두려는 자에겐 결코 자유를 누릴 자격도 특권도 없다.
자유란 가만히 있어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과 멸시를 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가는 이 땅위에 5백만 장애인들은 뜻과 힘을 모아 한 목소리로 힘차게 진리를 외쳐야 한다.
진리는 외치면 외칠수록 커지는 것이고, 진리가 커지면 마침내 모든 이들에게 참 자유의 선물을 얻게 되리라.
진리가 갇혀 자유에 목말라 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야윈 얼굴로 떨리는 손으로 진리를 달라고 하는데, 진리를 선포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진리에 족쇄 채우고 펜 끝에, 혓바닥 끝에 놀리고 있다.
진리가 포위된 살벌한 이 땅위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자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진리가 어둠 속에 갇혀있는 삭막한 이 땅위에선, 구석을 샅샅이 뒤져도 자유는 찾기 어렵다.
진리가 명예와 부를 채우는 상품으로 전락되는 더러운 이 땅위에선, 분쟁, 다툼, 이기주의, 갈등, 대립, 죽음의 긴 그림자만 드리워질 뿐이다.
눈물을 흘리며 뜬눈으로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몸부림치고 있을 나의 진정한 친구 장애인들이여!
나 먼저 죽거들랑 조사나 멋지게 써주게나.
이제 가네, 이제 가네, 나 이제 떠나가네.
목발잡고 절룩거리던 다리 이 세상에 모두 던져놓고 나 이제 눈물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놀림 받았던 아픈 다리, 더러운 세상에 묻어두고, 나 이제 고통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차별과 편견의 어둠속에서 두렵고 겁에 질려 치를 떨어야 했던, 실명한 두 눈, 뒤틀려 휘청거리던 몸뚱어리, 강한 자만 살아남아 차치고 포치는 송장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불공평한 세상, 놀림 받고 차별에 진저리 친 육신 모두 내려놓고, 나 이제, 차별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네.
장애는 슬픔이고, 고통이고, 엄청 불편한 것이라고, 마지막 떠나는 길에 마지막 진실을 털어놓고 떠나가네.
무시와 소외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더러운 세상, 나 비록 경쟁에서 밀려나 서러움에 겨워 울었으나, 쓰고, 맵고, 달고, 시큼한 비빔냉면 먹는 맛을 보며, 세상 구석구석 못 볼 놈, 볼 놈, 두루두루 만나보고, 잘 놀고, 잘 지내고, 인생경험 골지게하고 떠나가네.
장애인들이여!
내 저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에 하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애는 엄청 고통이고, 무지 슬픔이고, 견디기 벅찬 것이고, 피 눈물 나게 불편하다고, 가감 없이 모두 털어놓을 참이네.
이철용
전국회의원, <꼬방동네사람들>, <어둠의 자식> 등을 쓴 소설가이기도 하다.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작성자이철용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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