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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대한 왜곡된 타(他)화상, 이제 그만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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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의 부모님께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나에게 부모님은 어떤 존재인지

“난 어디에서 왔어?” 어릴 적, 아빠께 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장난 끼 가득한 얼굴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하시곤 껄껄 웃으셨다. 그 말에 난 하루 종일 울고 또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 연극을 보는 내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핏줄·혈통으로 이어진 생명의 근원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해보게 된 듯도 하다.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함께걸음’으로부터 이 작품의 리뷰를 부탁받고, 작품에 대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2005년 초연 당시 여러 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던 작품. 부성애가 주제이고 장애가 있는 부모와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들이 등장하며 희극적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라는 정도의 시놉시스를 읽었다. 순간, ‘우리나라에서 이런 주제와 이야기를 희극에 웃음을 입힌 비극으로 승화시킨다?’라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심 기대감과 호기심에 설레기도 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14살 선호에게는 지적장애가 있는 아버지와 지체장애가 있는 어머니, 그리고 물에 빠져 일찍 죽은 누나가 있다. 선호네 가족은 큰아버지와 이모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하며 선호의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하는 현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호의 병이 재발하여 수술비 문제로 큰댁과 이모와도 갈등이 생기게 되어, 그나마 받던 도움도 끊기게 된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도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절절하다. 선호의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고, 급기야 농약을 마시는데…….

연극을 관람한 후 며칠 동안 줄곧 가졌던 의문은 ‘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던질 수 있는 아비의 용기는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도대체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존재이고, 또 부모는 자식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저런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아직 그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는 부모와 자식의 핏줄로 이어지는 인연에 대한 근원을 우리에게 묻고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현실극복의지 없이 ‘맹목적 사랑’에만 매달리는 모습으로 비춰져


그러나 주인공의 극단적이고 대안 없는 현실은, 부성애나 모성애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배경일 뿐,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은 이끌어내지 못할 듯하다.
보통 가족애 또는 부모애의 주제를 풀어내는 핵심은, 예나 지금이나 맹목적인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삶이 고될지라도, 흠이 있더라도, 그리고 장애가 있더라도 혈연이라는 운명공동체적 사랑으로 이겨나가야 하는 것, 그래서 희생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이것이 가족이고 부모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어떤 갈등을 만들어 내야하고 풀어가야 하는 드라마에서는 충분히 위험 요소가 내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의도는 좋지만, 현실보다 더 극단적인 현실을 조명하게 되고 이야기의 주체인물을 감성적으로 희생시키는, 그래서 상대적 행복이나 반성·희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 구조 방식을 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런 삶도 있는데…’ 라는 약간의 우월적 시선, 혹은 왜곡된 부모의 자화상을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런 이야기의 틀은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에서도 중심축이 된다. 선호의 부모는 장애가 있다. 생활도 넉넉하지 않고, 거기에 아들까지 소아암을 앓고 있다. 이보다 더 힘든 현실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현실을 벗어나려는 의지도 없을뿐더러, 주변엔 그들의 자립을 도울 진정한 조언자도 없다. 큰댁과 선호 이모는 약간의 생활비와 치료비를 줄 뿐 그들의 자립을 도울 어떤 방법도 알아볼 생각조차 못하다가, 결국 책임감 없이 일방적으로 ‘알아서 살아라’라며 손을 놔버렸다. 이장과 목사 역시 극의 감초 역할에만 충실할 뿐, 현실적인 도움에 대한 설정은 전혀 없었다. 선호의 가족이 힘든 현실을 이겨나갈 힘은 오직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방법, ‘사랑’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은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들의 어려움 대부분은 제도와 정책의 문제가 얽혀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적인 문제는 간과한 채, 선호의 큰아버지는 선호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땅을 팔아 마련한 1천200만원을 주면서 “이돈 주면 맛있는 것도 매일 먹여주고,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다더라(시설을 의미한다). 너희들은 세상의 민폐니까 그곳으로 들어가라.”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선호 아비 어릴 때, 아기를 못 낳게 하는 수술(지적 장애인 정관수술)을 받았는데, 실패해서 선호 같은 자식을 낳았다.”라는 대사들도 거침없이 튀어 나온다.

이런 대사들이 이 극의 전체적인 플롯과 함께, 줄곧 아들의 아픔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아버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구박과 폭력에 매번 비는 엄마, 생활고에 시달리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장면과 겹쳐지며 그러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대로 받아들이게 할 확률이 매우 높아보였다.

   
사실 선호의 엄마는 지체장애만 있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현실과 동떨어진 인물이라는 설정이었는데, 무대 위에서 본 엄마 역할은 지체장애와 지적장애를 복합적으로 가진 것으로 오인할 수 있을만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게다가 관객들은 상황과 내용에 관계없이 반복적이고 수다스러운 철없는 엄마의 모습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다소 과장된 행동, 경주사투리의 억양이 주는 코믹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특히 엄마의 호들갑스런 연기에 큰엄마에게 쩔쩔매는 모습이나 이모의 말만 믿고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큰아버지 몰래 땅을 담보로 대출신청을 한 사실이 밝혀져 온갖 욕설과 모욕,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관객들은 박장대소 한다.

물론 웃음 포인트는 각각 다르다고 하지만, 온갖 모욕적인 언사와 폭력에 쩔쩔 매며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웃는 것이 과연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나온 웃음이었는지, 단순히 그녀의 행동과 억양이 주는 코믹함에서 나온 웃음이었는지는 되짚어 볼 일이다. 결국 이 연극은 장애에 대한 왜곡된 타(他)화상, 즉 짐스런 존재·의존적 존재 등을 부각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성애나 모성애는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부성애’를 역설하는 위험한 이야기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혜적 관점과 권리적 관점은 분명 차이가 있다

우선 ‘시혜’와 ‘권리’라는 두 단어의 어감에서부터 그 차이가 느껴진다. ‘시혜’의 어감은 ‘베푼다’는 의미로 느껴지고, 이 ‘베푼다’는 단어는 적선이란 의미와 맥을 같이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상하의 관계, 즉 베푸는 쪽의 입장을 대변한 우월적인 관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권리’의 어감은 ‘당당하다’ 혹은 ‘당연하다’는 의미로, 대등한 관계 또는 평등사상이 포함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전적 의미를 봐도, ‘은혜를 베풀다, 또는 그 은혜’란 뜻과,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 공권, 사회권이 있다’는 뜻으로 각각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의 복지라는 개념은 시혜적 관점으로 국가나 공동의 책임의식을 축소시켜왔다. 그러므로 예산에서도 복지 분야는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수적 열세와 권력구조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장애인 대상 복지 예산은 더욱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를 대변해야 하는 대중문화 역시, 좀 과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장애인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시켜, 적선과 일맥상통하는 보조금을 받으며 국고를 낭비하는 이미지로 비춰지는 이면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장애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나아져, 당당한 장애인 상을 그리려 노력하는 작품들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지만, 오랫동안 패인 잘못된 인식의 골은 그리 쉽게 메워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의도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알리는 것이면서도 오히려 무능력한 장애인 상을 심어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관점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권리적 관점에서 장애문제나 장애인 상이 그려진 방송 프로그램이나 공연을 항상 볼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보며,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를 관람하게 될 관객들에게 ‘연극을 볼 때는 권리적 관점에서 감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하면 부성애나 모성애에 대한 감동이나 선호 가족의 삶에 대한 애처로운 시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우리의 문제를 되씹어 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작성자백수정 서울YMCA 미디어교육팀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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