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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마니로 동글납짝한 장”

[오일장 속으로] 나주 남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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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 골목시장 안에 자리한 오경만·배오덕씨 부부 가게. 홍어 강의가 대단했다.
ⓒ 김창헌 기자


나주를 가며, 해남 영암 목포 무안 진도를 가며 지나쳐 가던 읍내다. 대도시 광주와 맞닿아 있어 출·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차가 막히는 곳. 많은 사람이 신호등 너머로 낮은 읍내 건물에 눈길을 주다 휙, 하니 돌아서는 곳.

나주의 관문이자, 전남 지역 10개 시·군의 입구라 할 수 있는 남평읍.
원래는 ‘남평오거리’가 아니라 ‘남평삼거리’였나 보다. ‘삼거리이발소’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있다.

남평장(1·6일)이 서는 곳은 남평리 2구, 시장마을. 시장마을의 행정이름은 ‘장기리(場基里)’. ‘장기(場基)’는 ‘장터’의 한자 표기다.
“도시 큰 시장에는 못 대더라도 짝은(작은) 시골장이라고 하믄 서운하지.”
장을 돌다 보면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단장한 장터와 예전의 옛 장터가 보태져 있다. 두 장터가 골목길로 연결된다. 낮에도 전깃불을 켜놓고 장사하는 골목시장이 있다. “여기도 장이 있었네” 하며 발길 해야 하는 곳이 여러 군데다. 그만큼 남평장은 규모가 있다.

무논에 뿌릴 비료를 사료 나온 김갑주(70) 할아버지는 “나주의 3대 시장이 영산포장, 성북장 하고 여기 남평장이여. 메달로 따지믄 남평장이 시(세) 번째인 동메달인디, 나주에서 시 번째 간다믄 큰 장이제, 작은 장이 아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평장과 담양장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는 한 어물 장사는 남평장 모양새를 ‘홍어’에 댄다.
“댐양(담양)장은 갈치 마니로(같이) 길고, 남평장은 홍어 마니로 둥글납작하고.”
장 모양새의 특성이 사람들 장 보는 것에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댐양장은 (사람들이) ‘쓱’하니 지나가분디, 여그는 둘레둘레 돌아야 되니까 (사람들 걸음걸이가) 설렁설렁해. 돌다가, 되다고 쉬는 할매들이 많애.”

 

▲ 붉은 보자기 안에 든 것은 뭘까? “내야 아녀. (주인은) 약 사러
간다고 약국 갔어.” ⓒ 김창헌 기자
▲ 대한민국 할머니들은 말한다. “머리에 이는 게 가장 수월하다.”
그러나 나이 여든 드신 할머니는 말한다. “다 (젊어서) 도글도글할
때 얘기여.” ⓒ 김창헌 기자
“울 애기들 지름 짜줄라고 숨근 들깨여라”

새로 지은 장터의 입구는 따로 있지만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모여드는 곳은 읍내 도로가 있는 남평농협 앞. 길가에 물건이 늘어지며 장터가 한 발짝 넓어진다.
정류장에는 시골에서 가져온 물건을 받으러 서 있는 할머니들이 여럿이다. 머리에 인 할머니의 짐을 끄집어내린다.

문평면 소재지에서 첫차를 타고 온 영암댁(67)도 세 할머니의 등쌀에 물건을 ‘압수’ 당했다. 할머니들은 물건 펼치며, 그제야 “애썼소” “일하기 된게 가위로 다 짤라븐디 애 터지게 뽑았네”하며 인사를 건넨다. 영암댁이 가지고 온 것은 온종일 뽑았다는 마늘쫑. “(마늘쫑 뽑으려면) 장갑을 못 끼고 일을 한게 (손에) 물집 생겨갖고 숟꾸락(숟가락)을 못 든당게.”

거래는 금방이다. 빼고 더하고 할 것 없이 한 다발에 천 원. 마늘쫑은 받아만 놓으면 팔리는 인기 상품. “요새 마늘쫑 장아찌에 밥숟갈 떠야 밥 묵는 것 같제….” 영암댁도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들깨, 팥 얘기로 물오른 토론을 하고 있는 데는 싸전이다. 다른 상인들 하루 장사 시작할 때쯤 싸전은 막판이다.
두 할머니가 물건을 넘기지 못해, 다시 집으로 들고 가야 할 판인데 적자(適者)가 나타나 만지작거린다.

“이런 깨 나오기 힘들어라. 뻔들뻔들 하잖애라.” 3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싸전 중매일을 했다는 할머니가 손님을 붙잡으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손님이 “알맹이가 너무 잘다”는 말을 하자, 들깨 주인 할머니가 직접 나선다. ‘들깨를 모르고 들깨 사러 나왔다’는 식의 호통에 가깝다. “들깨 굵은 것 사믄 못 써라. 울 애기들 지름(기름) 짜줄라고 숨근(심은) 거여라.”

▲ 할머니는 손님을 기다리고, 개는 따스한 햇볕 아래 잠이 올 똥 말 똥.
ⓒ 김창헌 기자

소서(小暑) 전에, 일찍이 심은 들깨라고 한다. 일찍이 심은 들깨는 알맹이가 작아도 속이 꽉 차 기름을 짜면 양이 많이 나오고 고소하다. 그러나 소서를 넘겨 심은 들깨는 알맹이는 굵지만 여물지 못하다. “알맹이 굵은 놈은 폴아(팔아) 먹기 좋은게 숨는 거여라. 잘잘한 것이 빵빵한 줄만 아소.” 중매인 할머니가 나서 거래를 마감시킨다. “아, 2천 원 떼어내 불고 끝내.”
딱 다섯 되 가져왔다며 들깨를 손님에게 넘기는데 대야에는 반 되 정도의 들깨가 남아 있다. 중매인 할머니 품삯.

다도면 풍산리에서 온 할머니의 팥도 그 손님이 가져갔다. “옛날 옛날 퐅(팥)이여. 시어머니가 하던 거 50년 넘게 하고 있어. 시방 나오는 퐅 내야 맛이 안나. 묵어보믄 알어.” 이번에도 중매인 할머니가 제 역할을 해낸다. “팥을 (손님들이) 때깔(빛깔) 보고 많이 사간디, 팥은 때깔 보는 거 아니여라.”

▲ 웃고 삽시다! ⓒ 김창헌 기자
▲ 장에 나온 노부부. 그 ‘맹세’가 생각난다. “경로당에서 고스톱하
는 그날까지 사랑하리라”. ⓒ 김창헌 기자
“씹으면 ‘톡’ 거린 것 내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채소를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크다.
“미나리 장사 지나가요. 오이 장사 지나가요. 호박 장사, 머굿대(머우대) 장사, 다 지나가요.”
그 말이 재밌어 웃고 있다가 조정예(74) 할머니가 던진 말에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내 파는 여그 있어요. 안 지나가요. 사가요.”

조정예 할머니는 세 할머니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장사하고 있는데 물로 끓여 먹는 민들레 뜯어온 할머니도, 이것으로 만든 떡같이 맛난 것 없다는 지비쑥(제비쑥) 해온 할머니도, 따기 힘들어 심을 것이 못 되는 녹두를 가져온 할머니도 모두 조정예 할머니의 생솔을 다듬고 있다. “내가 이 줄에서 대빵이여. 시키믄 해야제.” “삯은 못 주니까 솔로 가져가라” 한다. 지비쑥 파는 할머니는 “애 터진게 해주제. 할매들은 다듬는게 일이잖애”라고 말한다.
못 먹고 살 적에는 솔이 약이었다고 한다. 배 아프면 생솔에 밥을 비벼 먹었다. 조정예 할머니는 지금도 배 아픈 데 솔만한 게 없다고 말한다.

남평장에서 옛 시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좁은 골목시장이다. 낡은 집, 낡은 포장 아래 전등불이 줄줄이, 옛 남평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잡화상 가게에는 이제 팔 수도 없는 옛 문방구들이 눈에 띄고 불빛 아래 젓갈과 김치는 더 맛을 낸다.

▲ 할머니 넷이 모이니, 그 많은 생솔 금방 다듬었다. “삯은 못 주니까 솔로 가져가.”
ⓒ 김창헌 기자

소란스럽게 장사하는 곳이 오경만(52)·배오덕(45)씨 부부의 생선가게다. 오랜만에 발걸음 한 단골손님한테 “그동안 안 사간 것, 오늘 몰아서 사 가라”고 농담을 한다.

손님은 “씹으면 ‘톡’ 거린 것 내놔”라 한다. 알이 든 병치를 찾는 것이다. “(신안) 지도 가서 못 찾은 것(알 밴 병치) 여그는 있겄다 해서 왔는게 얼른 내놔.” 오경만씨는 웃기만 한다. 병치를 싼다. “요리해 보믄 알 것인디, 이래나 저래나(알이 든 병치든, 아니든) 묵어 보믄 ‘역시나’ 할 것인게…. 알 들었으믄 알 값 쳐서 받고 알 없으믄 알 값 빼고 받을 건게 돈 아까워할 것도 없고….”
알이 들었다는 소린지, 아니라는 소린지 애매하다. 그러나 감 잡았다. “지도 갔다온 지 좀 됐지라?”

배오덕씨가 귀한 것 하나 더 내놓는다. “남평장에 우리집에만 있는 것”이다. 흑산도 홍어. 시골 장바닥에 나오기 힘든, 값나가는 물건.
“믿는 나무가 고목 된다는디….” 하지만 보여준다. 외국산 홍어와 다른 점. “물 건너온 것은 (몸)에 까만 점이 확실히 보이지라, 근디 요놈(흑산도산 홍어)은 점이 보이요, 안 보이요.” 흑산도 홍어는 몸에 난 점이 외국산 홍어보다 훨씬 작다. 자세히 봐야 보인다.

‘맨맞한(만만한) 홍어좆’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는가. 남평장에 와서도 그 내력을 듣는다.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비싸. 그렁께 옛날에는 ‘물건’을 짤라불고 폴아묵은 사람들이 있었어. 그래서 그 말이 나온 거여.” 그렇더라도 암놈과 수놈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꼬리를 보믄 암놈은 까시(가시)가 한 줄이고 수놈은 여러 줄이여.”

▲ “테이프가 돌아가야 일이 되제.” 카세트 껐을 때가 장 파하는 시
간이다. ⓒ 김창헌 기자
 “소전 하믄 남평장, 돼지전 하믄 반남장”

시어머니가 하던 장사를 이어받아 3대째 옷가게를 하고 있는 한 아줌마는 “오늘 남평장 맞어?” 한다.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없나” 푸념한다. “사람 안 나온 게 한나(한 명)만 지나가도 환장하겄네.”

농촌이라면 어디나 바쁠 때지만 남평장에 더욱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죄다 배밭으로 갔기 때문이다. “배 솎아내느라고 정신없어. 열매 굵게 열리라고 가지에 시(세) 개 남겨놓고 따고 니(네) 개 남겨놓고 따고 그려.”
다른 때보다 고사리 값이 약간 비싸진 것도 이 때문이다. 배밭에서 일하느라 고사리 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장에 나오는 물건도 적다.

손님이 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아들과 어머니. 외출할 때 입을 ‘몸빼’를 고른다. 아들은 다른 옷을 고르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몸빼만 고집한다. 옷값 계산은 할머니가 했다. 아들도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은 (돈을) 뭉탱이(뭉치)로 줘야지 설레설레 주는 것은 필요 없어.”
옷가게 앞 식료품 가게로 간다. 남평장에서 가장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집이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들락날락하는 집. 남평장 터줏대감 김목술(81) 할아버지가 깔끔한 옷차림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김목술 할아버지는 16살 되던 해부터 ‘물장사’(염료장사)를 했다. 미영베(무명베) 모시베 입고 다니던, 집집이 물레소리 베틀소리 새어나오던 시절 남평장 화순장 보성장 능주장을 돌며 검정물 백색물 등을 팔았다. 그러다 70년대 이후 값싼 수입 원면과 화학섬유가 나오며 염료의 사용이 줄자 남평장에서 식료품 가게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남평장 자랑으로 지금은 사라진 ‘우시장’을 손꼽는다. 남평우시장은 실세를 과시하던 영산포장이나 성북장보다 크고 이름나 있었다. “소전 하믄 남평장, 돼지전 하믄 반남장 그랬어. 소전이 크게 서니까 해 넘어가도 촛불 켜고 초꼬지불(호롱불) 켜고 전깃불 켜고 장사를 했제.”

남평우시장의 1년 거래량은 5천 두 이상이었다. 그런 영화가 있었기에 교통발달과 거래방식의 변화로 우시장이 사라진 이후, 지역에서는 몇 차례 우시장을 다시 세우려 애썼다. “시대가 바뀌어분게 할 수가 있가니.” 곰탕의 유래에서도 남평우시장의 기세를 찾아볼 수 있다. 함평우시장설과 남평우시장설이 맞서고 있다.

또 남평장은 싸전이 컸다. 그 기운은 옛날보다 못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새벽 4시부터 싸전이 열린다. “예나 지금이나 쌀전이 질로 먼저 열려. 옛날에는 돈이 없는게 쌀 닷 되도 폴고 서(세) 되도 갖고와서 폴고,. 됫밑(곡식을 되로 되고 난 뒤에 조금 남는 분량) 받아먹는 중매인이 시방은 하나 남았지만 예전에는 10명 넘게 있었제.”

남평장 싸전은 하루에 3천 가마니 정도가 거래되는 큰 전이었다. “질 좋은 쌀은 광주 사람들이 와서 거즘 다 폴아갔제. 말구루마에 싣느라 정신 없었제. 그것 빠져나가야 다른 전이 서고 했어.”
남평은 광주라는 큰 소비처가 있어 일찍이 시설재배가 시작됐다. 나주 시설재배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오이 고추 무 배추 등이 남평장에서 대량 거래되던 때가 있었다. “쌀뿐만 아니라 채소고 과일이고 광주 사람들이 다 거둬갔어. 시방도 식당 하는 사람들은 남평장 와갖고 취나물 상추 솔 다 사가.”

ⓒ 김창헌 기자
 
“팬티 차림으로 수박 참외 사러오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제.”
50∼60년대까지만 해도 남평장에는 생선이 귀했다. “시골 사람들이 생선 묵을 줄이나 알았가니. 장에 암 것도 없었어. 굴비나 걸어놓고, 새비(새우)나 놓고 폴았제. 모심으러 가믄 굴비 하나씩 주고 새비 볶아묵고 그랬어.”

남평장에 생선이 놓일 수 있었던 것은 경전선 철도 때문이다. 보성 벌교 여수 등지에서 기차를 타고 대야장사들이 왔다. “남평역이 광촌리에 있어. 읍내에서 상당히 멀제. 십리가 넘어. 열차 쭈르륵 앞으로 댕기는 장들은 바닷가 여자들이 물건 머리에 이고 허리에 걸치고 와 있는디, 우리 장은 그런 게 없었어. 걸어오기 힘든게. 그러다가 한나(한 사람이) 와서 돈 벌고 가고 두 사람 와서 돈 벌고 가고, 소문 나갖고 그때부터 몰려들었제.”

남평역에는 바닷가 사람들 어물을 장으로 실어 나르는 말구루마가 생겼다.
김목술 할아버지는 우시장이 없어진 것도 남평장을 예전보다 못하게 만들었지만 광주 양동시장에 공판장이 생기면서 빠르게 장 모양새가 무너졌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쌀이고 채소고 여그서 다 떼어다 폴았는디 양동공판장이 생기고 크게 장사하는 중매상들이 다 그리 가불었어. 농산물 집하소가 소매상으로 전략해버린 격이제.”

대도시 ‘뽀짝’, 너무나 편리한 교통도 남평장을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게’ 만든, 두말할 것 없는 이유다. 광주까지 차로 20여 분, 광주시내버스가 남평까지 온다.
할아버지 기억 속에 남평장은 아주 재밌는 풍경도 벌어졌던 장이다. 여름이면 팬티 차림으로 장에 오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아 드들강육수해수욕장 몰라. 여름이믄 광주 사람들 싹 그리 모여서 물놀이 했어. 장날이믄 물놀이 하다가 팬티 차림으로 수박 참외 사러오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제.”

▲ 우리는 친구! ⓒ 김창헌 기자
“반지락장사 옆에서 장사한게 묵어봤자 반지락국이여”

“잘 사는 날이 올 거야 고민을 하지 말아요∼. 요리보고 저리 봐도 우리 사이 좋은 사이 잘 살 거야∼.”
테이프 틀어놓고 채소와 나물을 파는, 왕곡면 양산리에 온 행정댁(63)은 콩나물 300원어치도 판다. “나는 장사할 줄 몰라” 하지만 그게 행정댁의 장사 방법이다. “내가 생각해 주믄 그 사람도 생각해 주게 돼 있어. 300원어치도 폴아야 천원어치도 사고 만원어치도 사제.”

채소장사답게 모구대(머우대)와 생강에 비유해서 다시 설명하는데 깊게 새길만하다. “모구대도 시깔(색깔) 이쁜 놈을 삶아야 폴기 좋게 시깔이 이쁘게 나와. 자기 마음씨가 좋아야 장사도 잘하고 그런 거여. 돈은 배추종자 그런 것까지 얼릉 나오기를 바라믄 돈 모으기 틀린 거여. 보리 비고(베고) 도리깨질 할 때 올라오는 생강 마니로 늦게 나올 폭 잡고 장사를 해야 사람들이 서서히 앵기는 거여. 이래나 저래나 심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될 일도 되고 안 되는 일도 돼.”

행정댁은 우스갯소리로 “옷가게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굴비 장시 봐봐. 반지르르 하잖애. 나는 반지락장사 옆에서 장사한게 묵어봤자 반지락국이여.” 그래도 “반지락 하고 야채가 궁합은 맞제. 국물은 낸게.”

남평장에서 ‘뻥튀어∼’ 하는 소리 들리면 얼른 귀 막아야 한다. 어김없이 ‘터진다’. 깜짝 놀라면 할머니들 웃음거리가 된다. 튀밥가게처럼 인심 좋은 곳이 없다. 한 주먹 집어먹으면 또 한 주먹 건넨다. 

ⓒ 전라도닷컴 남평장 특산물

“원래 고슬고슬 맛있는 쌀이여”
남평쌀

지석강(드들강)의 풍부한 수량에 힘입은, 남평리 교원리 평산리 일대에 펼쳐진 남평들. 특히 육림들과 광이들에서 나는 기름진 쌀은 예로부터 값나가는 물품이었다.
나주시사를 보면 ‘남평(南平)’이란 땅이름도 들판과 관련해 생겨난 것이다.

남평의 옛 이름은 ‘미동부리(未冬夫里)’. ‘미(未)’는 우리말 ‘물(水)’의 옛 표기인 ‘미르’의 한자 표기이며 ‘동(冬)’은 ‘들판(坪)’을 의미하는 ‘들’의 한자표기이다. 즉 지대가 낮아 ‘물이 차 있는 들’이라는 뜻이 된다. ‘부리(夫里)’는 ‘마을’의 옛 표기. ‘물이 차 있는 들을 가진 마을’ ‘물이 풍부한 들마을’로 해석할 수 있다.

남평이란 이름도 저지대이기 때문에 ‘낮은 들’이 되고 낮은들>낮들>남들이 되어 한자로 쓸 때 ‘남=南’으로 하여 ‘남평’이 된 것. 

남평쌀은 지금 전국적으로 이름나 있다. 밥맛 좋기로 알려져 왔지만 상표의 역할도 크다. 남평쌀의 상표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가 있다.
지난 2002년 고려왕조 창건을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 <왕건>이 인기를 끌었다. 방송 장면 하나로 왕건이 백제의 나주땅을 점령하고서 나주평야의 기름진 땅에서 나는 쌀로 지은 밥을 먹으며 밥맛에 감탄하는 장면이 방송된다.

남평농협 관계자가 이 장면을 봤고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제안을 한다. 남평쌀 이름을 그동안 써왔던 ‘청무미’ 대신 ‘왕건쌀’로 바꾸자고. 회의가 진행됐고 결과가 나왔다. 2002년 가을에 나온 햅쌀 상표명을 ‘왕건이 탐낸 쌀’로 결정했다.

인기 드라마가 낳은 상표 ‘왕건이 탐낸 쌀’은 서울의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입점, 농산물 상표화에 대표적인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 2001년까지 2만4000포(11억원어치) 정도 팔리던 남평농협 쌀은 ‘왕건이 탐낸 쌀’로 새로 단장한 이후 2002년 3만포(13억5000만원어치), 2003년 3만5000포(16억원어치) 등으로 판매량이 급증했다.
최복순(76) 할머니는 “원래 남평쌀이 고슬고슬 맛난 쌀이여. 이쪽 사람들은 알았는디 서울 사람들은 몰랐는게 인자 막 사 묵지”라고 말한다.


작성자김창헌 기자  gudu@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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