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등성이 어딘가에 그 여름밤의 집이 여전히 있다
장흥 제암산에서의 1박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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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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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땀을 닦으며) 우리가 얼마나 올라왔을까. 고도계가 있으면 좋겠는데. 근데 고도계는 무슨 원리일까.
옹: 기압차로 측정하는 게지. 그나 아까 점심을 잘못 먹었나. (딸꾹질을 하며) 횡경막이 경련을 하는구나.
강: (골똘히 생각하며) 음. 고도차가 그렇다면 우리가 감나무재부터 올라왔으니까….
나: (구름처럼 몸을 살랑대며) 앗싸! 저기 좀 봐! 구름이 살랑살랑 고개 넘다 자빠지네!
# 거대한 텐트 물 새는 수통 보따리 이고 지고
각자 본연의 모습을 찾은 대화를 나누게 될 무렵까지 세 사람은 힘든 오름길을 걸어왔다. 그간 누적된 운동부족과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름더위 탓이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바로 그 자칼텐트였다. 그 텐트는 차에 싣고 가 해변에나 부림직한 것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등산’이라는 야외활동을 좀더 가뿐히 즐기겠다고, 현대인들은 많은 기술을 등산용품 개발에 쏟아부어 왔다. 절대적인 모토는 ‘무게 줄이기’이다. 두 달 남짓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어떤 산꾼은 칫솔 손잡이를 반으로 분질러 가져갈 정도다. 비행기나 우주선 제작에 쓰이는 가볍고 비싼 소재 ‘티타늄’이 등산용품에도 쓰인다. 그런 마당에 바닷가용 텐트라니. 사실 압축을 모르는 그 무거운 보따리가 무슨 죄랴. 그걸 산으로 지고 나르겠다는 사람들이 죄다.
바닷가용 텐트와 물을 빵빵히 채운 ‘자바라’ 물통이 든 빵빵한 배낭을 메고 산꼭대기를 오른 ‘옹’. 이는 1박2일을 위한 숙명이었다. ⓒ 이혜영 |
그 사이 강은 심한 운동부족의 효과에 시달리느라 자신과의 싸움에 한창이었다. 나 역시 내 한 몸은 그런 대로 부렸음에도 오랜만의 여름산행이라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옹의 무거운 배낭을, 더 무거운 텐트보따리를 번갈아가며 메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복병, 생명수의 운반 문제가 남았다. 제암산 지나 우리가 묵을 능선 언저리에는 샘이 없었다. 또 처음부터 물길을 아예 등지고 산을 탔기 때문에 도중에 작은 개울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출발점부터 물을 짊어지고 올라야 했다.
옹이 당당히 수통을 꺼냈다. 또 다시 강과 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은 아코디언처럼 몸뚱이를 늘렸다 폈다하는 ‘자바라’ 물통이었다. 그걸 빵빵이 채워 배낭에 넣고 오른다고 상상하니 아찔했다. “이거야 약수터에 갈 때나 쓰는 거죠. 이걸 배낭에 넣고 어떻게 산꼭대기를 올라요. 엉엉.” “걱정마라. 수통도 내가 진다.”
하지만 ‘갑빠’에 손상을 주지 않겠다고 텐트와 물을 온통 옹이 지게 할 수는 없었다. 봉우리 무렵부터 기력을 회복한 강과 나는 옹의 텐트보따리와 짐을 나눠지기 시작했다. 짐을 나누려고 배낭을 들춰 보니 바닥이 축축하고 수통을 싼 비닐이 묵직했다. 수통의 물이 새고 있었다. “예전에 별일 없이 썼으니 그대로 가져왔제.”
사전점검의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물 한 방울 없는 산으로 가는 길에 조금씩 새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피다. 우리는 서둘러 물을 작은 페트병들에 나눠 담았다.
식은 바람이 온몸을 부비고 가고 풍경도 시원하고. ⓒ 이혜영 온통 초록, 온갖 초록. 장엄하다. ⓒ 이혜영 # 오합지졸 부대의 낭만적인 밤
오합지졸 부대를 낭만파 부대로 이름표를 바꿔 달게 한 산상 음악. ⓒ 이혜영 |
강의 구라와, 옹의 힘찬 노래와, 나의 막춤이 남은 능선길을 다 채울 즈음 우리가 묵을 만한 터가 나타났다.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종합세트를 음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샘터는 없었지만.
짐짝처럼 실려 온 텐트가 드디어 위용을 드러냈다. 생명수가 담긴 병을 차곡차곡 쌓았다. 텐트를 치면서 붉은 일몰을 보았다. 천장에 줄을 걸고 대롱대롱 등을 달았다. 버너 위에 지글지글 전지살이 익었다. 생맥주는 없지만, 달큼시원한 수제식 복분자술이 ‘과업’을 달성한 부대를 위무했다.
이쯤이면 산상의 밤을 보낼 준비로 충만하다. 곧 죽어도 음악은 포기 못하는 강이 스피커를 꺼내고 나는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이어 붙였다. 이제 오합지졸 부대는 낭만파 부대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그 길은 이미 지나왔으므로 금세 추억이 되고 개선의 징표가 되었다.
짐짝처럼 실려 온 텐트가 드디어 위용을 드러냈다. ⓒ 이혜영 |
바다와 섬까지 함께 누리는 기쁨. ⓒ 이혜영 |
밤이 깊어가고, 한 잔 두 잔에 이야기와 노래가 익어갔다. 텐트에 부딪히는 밤바람 소리, 바다에서 산 넘다 넘어진 빗방울이 후득후득 추임새를 넣었다. 산상의 밤은 그 모든 폼 안 나는 물건들을 이고 지고 죽네 사네 푸념을 보태 빚어볼 만한 희열을 줬다. 산 위에 올려놓은 집은 적당히 엉성한 덕분에 산 기운과 더 가까웠고, 또 적당히 큰 덕분에 종일 흘린 땀들이 좁은 허공에서 악취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 반구(半球)의 광활한 밤을 몽땅 누리고 맞는 해
전지살은 익어가고 추억도 익어가고. ⓒ 이혜영 |
제암산의 1박2일 이후 옹은 가볍고 튼튼한 산악용 텐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부대는 또 한번의 1박2일을 감행했다. 이번에도 물 없는 산을 올랐고, 내려오는 길에 나는 사람들이 발 씻는 계곡을 만나 잔뜩 생명수를 들이켰다가 설사도 했다. 모두 감내할 만한 고난이고 즐거움이었다. 장흥을 지날 때면 읍내를 굽어보는 제암산을 바라본다. 저 산등성이 어딘가에 그 여름밤이, 그 집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작성자이혜영 (문화웹진 씨네트워크 기자)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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