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등성이 어딘가에 그 여름밤의 집이 여전히 있다 > 문화


그 산등성이 어딘가에 그 여름밤의 집이 여전히 있다

장흥 제암산에서의 1박2일

본문

[전라도 닷컴]

곳: 장흥 제암산~사자산 능선. 주무대는 능선 사이 움푹한 안부.
때: 본격 여름더위로 진입한 2007년 6월 어느 날, 1박2일
나오는 사람들: 강(소위 ‘전라도의 3대 구라’ 중 1명. 구조적인 사고에 찌듦), 옹(잡학다식. 구어체 사용에 약하며 자주 치명적인 무대뽀), 나(모든 것을 막춤으로 표현함. 논리적 언어에 약하며 감성과 배설에 관심이 많음)

줄거리: 옹과 강과 나는 매캐한 도시 호프집 공기에 지쳐간다. 서로 뒤질세라 풀던 ‘구라’도 감흥을 잃어가던 어느 날, 셋은 돌연 ‘산상에서의 1박2일’을 도모한다. 마침 강은 그간 일 핑계로 방치한 뱃살들이 눈에 걸리던 터다. 게다가 뼛속 깊이 장흥사람임을 자부해온 그는 제 고향의 산에 올라 장흥사(史)를 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이 근질근질하다. 내심 ‘산녀’라고 자부해온 나는 오랜만의 야영 생각에 신이 난다. 특유의 ‘갑빠’와 책임감으로 무장한 최연장자 옹은 강과 나에게 텐트며 수통이며 자신이 준비할 테니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한다. 드디어 그 날 아침, 집결장소에 헐레벌떡 도착한 나는 먼저 와 있는 옹의 행색을 보고 기겁한다. 빵빵한 배낭을 멘 그가 차 트렁크에서 따로 끌어내린 것은 다름 아닌 6인용 자칼 텐트 보따리였는데….


    제암산을 오르며 바라본 풍경. 산과 들판과 바람, 사람 사는 마을의 종합세트. ⓒ 이혜영 # 제암산 못 미친 어느 오름길
강: (땀을 닦으며) 우리가 얼마나 올라왔을까. 고도계가 있으면 좋겠는데. 근데 고도계는 무슨 원리일까.

옹: 기압차로 측정하는 게지. 그나 아까 점심을 잘못 먹었나. (딸꾹질을 하며) 횡경막이 경련을 하는구나.

강: (골똘히 생각하며) 음. 고도차가 그렇다면 우리가 감나무재부터 올라왔으니까….

나: (구름처럼 몸을 살랑대며) 앗싸! 저기 좀 봐! 구름이 살랑살랑 고개 넘다 자빠지네!

# 거대한 텐트 물 새는 수통 보따리 이고 지고
각자 본연의 모습을 찾은 대화를 나누게 될 무렵까지 세 사람은 힘든 오름길을 걸어왔다. 그간 누적된 운동부족과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름더위 탓이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바로 그 자칼텐트였다. 그 텐트는 차에 싣고 가 해변에나 부림직한 것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등산’이라는 야외활동을 좀더 가뿐히 즐기겠다고, 현대인들은 많은 기술을 등산용품 개발에 쏟아부어 왔다. 절대적인 모토는 ‘무게 줄이기’이다. 두 달 남짓한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어떤 산꾼은 칫솔 손잡이를 반으로 분질러 가져갈 정도다. 비행기나 우주선 제작에 쓰이는 가볍고 비싼 소재 ‘티타늄’이 등산용품에도 쓰인다. 그런 마당에 바닷가용 텐트라니. 사실 압축을 모르는 그 무거운 보따리가 무슨 죄랴. 그걸 산으로 지고 나르겠다는 사람들이 죄다.

   
바닷가용 텐트와 물을 빵빵히 채운 ‘자바라’ 물통이 든 빵빵한 배낭을 메고 산꼭대기를 오른 ‘옹’. 이는 1박2일을 위한 숙명이었다. ⓒ 이혜영
“요사이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하필 이 텐트람. 이러다 초장부터 뻗는다고요!” “걱정마라. 텐트는 내가 진다.” 기술변화에 무심한 옹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듯 배낭에 텐트보따리까지 걸쳐 메고 제암산 봉우리에 올랐다. 어깨가 아파 이리저리 바꿔 메면서도 그 보따리는 1박2일을 위한 자신의 숙명이었다.

그 사이 강은 심한 운동부족의 효과에 시달리느라 자신과의 싸움에 한창이었다. 나 역시 내 한 몸은 그런 대로 부렸음에도 오랜만의 여름산행이라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옹의 무거운 배낭을, 더 무거운 텐트보따리를 번갈아가며 메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복병, 생명수의 운반 문제가 남았다. 제암산 지나 우리가 묵을 능선 언저리에는 샘이 없었다. 또 처음부터 물길을 아예 등지고 산을 탔기 때문에 도중에 작은 개울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출발점부터 물을 짊어지고 올라야 했다.

옹이 당당히 수통을 꺼냈다. 또 다시 강과 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은 아코디언처럼 몸뚱이를 늘렸다 폈다하는 ‘자바라’ 물통이었다. 그걸 빵빵이 채워 배낭에 넣고 오른다고 상상하니 아찔했다. “이거야 약수터에 갈 때나 쓰는 거죠. 이걸 배낭에 넣고 어떻게 산꼭대기를 올라요. 엉엉.” “걱정마라. 수통도 내가 진다.”

하지만 ‘갑빠’에 손상을 주지 않겠다고 텐트와 물을 온통 옹이 지게 할 수는 없었다. 봉우리 무렵부터 기력을 회복한 강과 나는 옹의 텐트보따리와 짐을 나눠지기 시작했다. 짐을 나누려고 배낭을 들춰 보니 바닥이 축축하고 수통을 싼 비닐이 묵직했다. 수통의 물이 새고 있었다. “예전에 별일 없이 썼으니 그대로 가져왔제.”

사전점검의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물 한 방울 없는 산으로 가는 길에 조금씩 새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피다. 우리는 서둘러 물을 작은 페트병들에 나눠 담았다.

    식은 바람이 온몸을 부비고 가고 풍경도 시원하고. ⓒ 이혜영     온통 초록, 온갖 초록. 장엄하다. ⓒ 이혜영 # 오합지졸 부대의 낭만적인 밤
   
오합지졸 부대를 낭만파 부대로 이름표를 바꿔 달게 한 산상 음악. ⓒ 이혜영
완만한 산자락은 힘이 있었다. 큰 나무 없이 다닥다닥 철쭉꽃이 수많은 상춘객을 끌어들였을 제암산 옆구리는 이제 이국적인 푸름을 펼쳐보였다. 알맞게 식은 햇살이 저 아래 장흥읍과 넓은 월평들판을 비췄다. 덩달아 식은 바람이 온몸을 부비고 갔다. 득량만 일대 가깝고도 먼 바다가 누운 거울처럼 반짝였다. 산과 바다와 바람, 사람 사는 마을의 종합세트. 그 덕에 오합지졸 부대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강의 구라와, 옹의 힘찬 노래와, 나의 막춤이 남은 능선길을 다 채울 즈음 우리가 묵을 만한 터가 나타났다.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종합세트를 음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물론 샘터는 없었지만.

짐짝처럼 실려 온 텐트가 드디어 위용을 드러냈다. 생명수가 담긴 병을 차곡차곡 쌓았다. 텐트를 치면서 붉은 일몰을 보았다. 천장에 줄을 걸고 대롱대롱 등을 달았다. 버너 위에 지글지글 전지살이 익었다. 생맥주는 없지만, 달큼시원한 수제식 복분자술이 ‘과업’을 달성한 부대를 위무했다.

이쯤이면 산상의 밤을 보낼 준비로 충만하다. 곧 죽어도 음악은 포기 못하는 강이 스피커를 꺼내고 나는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이어 붙였다. 이제 오합지졸 부대는 낭만파 부대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그 길은 이미 지나왔으므로 금세 추억이 되고 개선의 징표가 되었다.

   
짐짝처럼 실려 온 텐트가 드디어 위용을 드러냈다. ⓒ 이혜영
   
바다와 섬까지 함께 누리는 기쁨. ⓒ 이혜영
“삼겹살을 많이들 먹는데 사실 전지살이 담백하고 더 맛있제. 아직도 전지살의 묘미를 모르는 저 아래 대다수 중생들이 안타까워. 하하하!(옹)” “아까는 옹이 말수가 적대(강)” “사실은 정말 힘들었다. 제암산 막바지에선 말할 기력도 없드만(옹)” “자칼이가 갑빠에 큰 도전을 했네요! 근데 제암산 너무 예뻐. 장흥엔 천관산만 멋진 줄 알았는데(나)” “그건, 장흥이니까. 장흥 앞에는 정관사 ‘the’를 붙여야 돼(강)”

밤이 깊어가고, 한 잔 두 잔에 이야기와 노래가 익어갔다. 텐트에 부딪히는 밤바람 소리, 바다에서 산 넘다 넘어진 빗방울이 후득후득 추임새를 넣었다. 산상의 밤은 그 모든 폼 안 나는 물건들을 이고 지고 죽네 사네 푸념을 보태 빚어볼 만한 희열을 줬다. 산 위에 올려놓은 집은 적당히 엉성한 덕분에 산 기운과 더 가까웠고, 또 적당히 큰 덕분에 종일 흘린 땀들이 좁은 허공에서 악취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 반구(半球)의 광활한 밤을 몽땅 누리고 맞는 해

   
전지살은 익어가고 추억도 익어가고.
ⓒ 이혜영
산 아래로 진 해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반대편 산에서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반구(半球)의 광활한 밤을 몽땅 누린 우리는 느긋하게 집을 분리해 넣고 산길을 걸었다. 산에서 하루를 보내면 이튿날 먹을거리 무게가 훨씬 줄어 발이 날아가기 마련이다. 전날 밤이 아름다울수록 걸음은 더 가뿐해진다. 게다가 제암산에서 사자산 가는 길은 역동적인 파노라마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산답게, 남실대는 운해부터 빗방울, 난데없는 땡볕까지 반가운 변덕의 연속이었다.

제암산의 1박2일 이후 옹은 가볍고 튼튼한 산악용 텐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부대는 또 한번의 1박2일을 감행했다. 이번에도 물 없는 산을 올랐고, 내려오는 길에 나는 사람들이 발 씻는 계곡을 만나 잔뜩 생명수를 들이켰다가 설사도 했다. 모두 감내할 만한 고난이고 즐거움이었다. 장흥을 지날 때면 읍내를 굽어보는 제암산을 바라본다. 저 산등성이 어딘가에 그 여름밤이, 그 집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작성자이혜영 (문화웹진 씨네트워크 기자)  webmaster@jeonlad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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