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삶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삶과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는 영화, 스모크(Sm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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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국가 정신보건정책이라든가, 인구 백만이 사는 큰 도시의 정신건강프로젝트라든가, 학교에 큰 연구소를 세운다든가 하는 일 등으로 바빴습니다. 철저하게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의 소외가 전제되는 일에만 매진한 셈입니다.
그 결과로 새해가 시작되었음에도 저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고 아무런 다짐도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 연민에 대한 변명으로 오늘은 작심하고 미세한 일상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10년이 훨씬 넘은 영화지만 여전히 마니아들에게 사랑받는 영화, ‘스모크(Smoke, 웨인 왕 감독, 1995년 제작)’입니다.
브룩클린 7번가에서 담배가게를 하고 있는 오기(하비 키이텔 분)라는 중년의 남자와 아내를 은행강도 사고로 잃은 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설가 폴(윌리엄 하트 분)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담배 연기처럼 모아졌다가 흩어집니다.
담배를 여전히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담배 개피에 손이 갈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에는 또 다른 한 축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빠를 찾아가지만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흑인 청년 라쉬드와 음주사고로 아내와 자신의 왼팔을 잃고 한 순간의 실수를 후회하며 살아가는 라쉬드의 생부인 사이러스(포레스트 휘태커 분)가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아무도 다니지 않는 도로가 퍽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또 다른 여인이 오기의 담배가게를 찾아옵니다. 오기의 옛 애인 루비는 그들 사이에 딸이 있었고 그 딸이 브루클린 어딘가에서 마약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딸의 이름은 지극한 행복을 뜻하는 펠로시티(felicity)였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화를 내는 오기와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든 막다른 길의 루비 사이에 진실은 존재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혹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날 수 있다면 그냥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가 이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때론 한 사람에게 거짓말이 다른 한 편의 사람에게는 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삶의 모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지만 조금씩 진보한다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지난 10년간 매일 아침 8시, 똑같은 장소에서 5분 동안의 사진을 찍고 있는 오기에게 4천 장의 사진은 모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무심코 사진이 똑같다고 얘기하는 폴에게 오기가 이야기합니다. 천천히 보라고.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한 장 한 장 틀리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햇볕은 매일 다른 각도로 지구를 비추지. 사람도 얼굴이 매일 달라지고 옷도 달라지지. 오기의 말은 사실이었지요. 천천히 사진을 들추던 폴은 죽기 전의 아내 헬렌을 수천 장의 사진속에서 찾아냅니다. 그리고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폴은 오열합니다.
방안에 퍼져나가는 담배 연기와 함께 헬렌의 살아있던 미소가 폴에게 번져옵니다. 이 장면에 웨인 왕 감독은 무려 10분의 시간을 할애합니다. 문득 영화의 프레임이 느리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가 따분한 이유가 그것이지요. 영화의 대사처럼 감독은 관객들에게도 천천히 영화를 보라고 권합니다. 삶의 공허함. 그리고 공허함의 무게.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보려는 시도. 이를 통해 삶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는 영화입니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라는 단편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의 묘미는 당연히 오기와 폴이 영화속에서 동명의 소설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마지막 장면과 그 내용을 흑백의 영상으로 담은 엔딩 크레딧에 있습니다. 거짓말 같은 오기의 이야기가 끝난 뒤 폴은 좋은 이야기라고 가볍게 응수하고 인생의 가치는 비밀을 함께 나누는 재미라고 답하지요.
허연 담배연기를 비추며 영화는 끝납니다. 아직도 금연하지 못하는 분들과 지난 대선의 후유증으로 공허감을 느끼시는 많은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합니다. 과연 삶의 무게는 얼마일까요? 건강하세요.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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