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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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숙 기자 | ||
석암재단과 관련해 드러나는 횡령 등의 문제는 우리나라 사회복지 역사상 많은 복지시설들이 이미 자행해 왔던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암재단 관련 사안에 <함께걸음>이 유독 관심을 두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석암재단 산하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직접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장애우 단체들과 연대 고리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함께걸음>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생활인들이 주축으로 조직한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중심축으로 활동 중인 한규선 씨를 만나봤다.
“시설에서 딱 일주일만 살아보시죠”
그이는 “한 20년 쯤 됐지요.”라고 했다.
커피숍 창문 너머, 서울 시청 앞 여러 갈래의 건널목 앞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저렇게 살고 싶어요. 볼일이 있는 곳으로 바쁘게, 자유롭게 오가면서 말입니다. 제 나이 또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궁금하지만 상상조차 잘 안돼요. 삶이 다 제각각이겠지만, 시설 밖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까요.”
이제 40대 중반을 넘어선 한규선 씨. 그이는 석암재단이 운영하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20년을 살았고, 지금도 그 곳에서 살고 있다.
그이가 요양원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전동휠체어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씨는 “나는 요양원 방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전동휠체어 타고 나오기 전까지는.”이라고 말했다.
한 씨는 뇌병변 1급 장애 때문에 수동휠체어를 이용하려고 해도 휠체어를 밀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세계 1위 정보통신강국을 향해 돌진해 온 우리 사회다. 그러나 한 씨는 장애우 생활시설이라는 담장 안에서 아침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점심밥을 먹고, 다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녁밥을 먹고 잤다. 시설 안에서 20세기와 21세기는 별다르지 않았다.
생활시설로 보내졌던 스물다섯 그 때, 만약 이십년 뒤의 삶을 예측했다면 그래도 한 씨는 시설에 갔을까.
감히, 기자는 그랬을 거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면 그 때나 지금이나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설뿐이기 때문이다. 방법이 하나뿐인데, ‘선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시설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요. 바람직한 운영과 서비스를 하는 시설이라면, 시설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혼자 움직이기 힘든 저는 약 20년간 동네에 나가보질 못했어요. 그게 어떤 느낌일지 상상할 수 있으세요?
세상 사람들은 너무 쉽게들 말합니다. 시설에서 사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먹을 것 입을 것 주지, 잠도 재워주지… 심지어 제 가족들도 그런 생각을 해요.
그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시설에서 살아보라고. 사생활과 자유를 저당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왜 사회와 소통하고 싶은지를 알게 될 거예요.”
“왜 사회와 더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합니까?”
최근 한 씨는 석암재단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석암재단 측이 비민주적인 절차로 요양원을 이전하려는 것에 대응해 이전철회를 요구했고, 장애수당을 생활인 개인에게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설 종사자들의 인권교육과 생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립생활교육도 요구했다.
▲ ⓒ 김형숙 기자 | ||
석암재단은 인권단체들의 항의에 일단 이전 취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전을 이유로 정부와 지자체에게 약 20억 원을 받아 신축하던 시설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횡령을 저지른 재단에게 시설 하나 더 지어주는 상황이 된 거 아니냐는 우려도 하고 있다.
“최근 들은 얘기인데, 원장이 신축 건물로 가고 싶은 사람만 데리고 가겠다고 했대요.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생활인 중 80%가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들인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이전 예정지인 대곶면 송마리는 현재 요양원이 있는 곳보다 지역사회와 더 멀어서 소통하기 어려운 장소예요. 주변에는 민가도 없고 단지 재단의 노인시설과 공장과 축사뿐입니다.
재단 측이 지적장애우들이 이러한 생활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니까 저러는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사회와 더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합니까. 요양원 이전 반대를 했던 제가 원했던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니에요.”
생활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한 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이는 요양원 이전 문제는 재단이 민주화된 다음에 신중히 분석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택지개발 때문에 정말 이전해야 한다면, 버스정류장까지 30분이나 걸리고, 전동휠체어로는 시내 나갈 엄두도 못내는, 그런 외진 곳이 아니라 지역사회 안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 한 씨 주장이다.
도대체 왜 정부와 양천구청은 지역사회와 소통조차 불가능할 위치에 시설을 짓겠다는 석암재단에게 20억 원이나 하는 공사비를 쥐어준 것일까.
석암재단은 시설 장애우들에게 전했어야 할 장애수당 1억2천8백여만 원을 횡령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인권침해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비인간적인 상황이 종종 벌어졌었죠. 그러한 일은 대부분 지적장애우들에게 가해졌는데, 예를 들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밥을 굶기거나, 시끄럽다고 추운 겨울에 목욕탕으로 끌고 들어가서 냉수를 퍼붓거나 하는 일이 있었어요. 언어폭력은 다반사였고요. 이를 사무실에 말해도 개선하지 않더라고요.”
지원이 필요한 장애우들을 돌보겠다는 취지로 운영하는 곳이 장애우 생활시설이다.
‘불쌍하고 오갈 곳 없는 장애우’를 ‘거두고 돌보는 천사’로 불리며 사회적 명예까지 챙긴 석암재단 관계자들이 정작 시설 안에서는 장애우들을 우롱하고 있던 셈이다.
하긴, 사회복지사업자가 시설 장애우 돈 떼먹는 거 한두 번 들은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매번 놀랍고 도통 적응이 안 된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시설에서 오래 살면 바깥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하는지 잘 몰라요. 그래서 두려움이 크죠. 시설에서 내쫓길까봐 무슨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변을 못해요. 저도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았어요. 그 누구도 우리가 어떤 권리를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요. 아무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야죠.”
한규선 씨는 정보제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보가 있어야 계획을 세우고 꿈을 꿀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제 꿈이 뭔지 아세요? 제 또래 비장애우처럼 살아보는 거예요.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겐 그렇지 않아요. 비장애우에게 사회와 소통하며 사는 일상생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제게는 그게 꿈이에요. 40대 중반의 비장애우들, 그 세대는 대체 어떤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까요. 왜 제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을까요.”
안타깝지만, 지금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시설에 한 번 입소하면 자립하기 어려운 구조가 사회복지 현주소기 때문이다.
시설 생활인의 기초생활수급비는 운영비로 시설에 지급하기 때문에 생활인들이 자립을 위해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다. 시설 장애우는 임대아파트조차 신청할 수 없고, 혹여 지역사회로 나온다고 해도 한 달 이상 지역에 거주해야 생계비를 받을 수 있다.
시설 생활인들과 자립을 연결할 정책적인 고리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정작 시설 장애우들의 자립을 가로 막고 있는 벽은 정부다.
시설서 보낸 20년.
한규선 씨의 머리카락에도 어느 새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한 씨는 오래 전 포기했던 꿈을 추스려 실현해보려고 한다. 이미 한 씨는 첫 발을 내딛었고,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저는 제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차피 시설에서 삶을 마감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회와 소통을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답게 살아봐야겠습니다. 이제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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