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천국이자 지옥
본문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습한 공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한쪽 구석의 두 사내 그림자에 눈길이 가 꽂혔다. 어두운 형상 속에서도 눈빛만은 형형했다. 2인조 밴드 MOT(못) 멤버들. 3년 만의 재회를 반기며 악수를 나눴다. ‘흐음, 분위기가 더 깊어졌군.’ 역시 이런 날씨와 딱 어울리는 그들이다.
2004년 MOT의 데뷔앨범 <비선형>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음습한 연못 이미지를 담은 앨범 커버부터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까지 이어지던 축축한 그 느낌. 당시 이들의 음악을 지면에 이렇게 소개했다.
‘비선형(non-linear). 일부분을 보고도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선형(linear)의 반대말로, 원인과 결과가 일정치 않아 예측이 불가능한 상태를 뜻한다. … MOT의 음악을 들을 때는 그 순간 귀에 꽂히는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뒤이어 나올 소리를 미리 예측이라도 할라치면 그 예상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어김없이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이 데뷔 앨범 이름을 <비선형>이라 붙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면 무릎을 절로 칠 법도 하다.’
이들은 그해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비선형>은 얼마 전 경향신문과 웹진 ‘가슴’이 대중음악 전문가 52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59위에 꼽혔다. 2004년에 나온 신인의 데뷔앨범이 이 정도 순위까지 올라갔다는 건, 절대 가볍게 넘길 만한 결과가 아니다.
뮤지컬로 유명한 <헤드윅>의 원작자이자 같은 제목의 영화 감독과 주인공을 맡았던 존 카메론 미첼도 이들의 팬을 자처했다.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그는 기자회견장과 헤드윅 콘서트장에서 <비선형> 수록곡인 ‘날개’를 한국말로 불렀다.
“구글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한국 노래인데 너무 좋아한다”던 그는 MOT 멤버들을 콘서트장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MOT은 9월 단독공연에서 답가로 헤드윅의 ‘Midnight Radio’를 불렀다.
3년 전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땐 밴드 이름을 ‘엠오티’로 불러달라고 했다. 못을 영어로 표기한 MOT. 물론 못은 연못을 뜻한다고 했다.
처음부터 ‘못’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싶었지만, 망치로 박는 못을 떠올릴까봐, 이름이 주는 강한 느낌에 굉장히 센 음악을 하는 밴드로 오해받을까봐 걱정스러웠단다.
“우리 음악이 뜨거운 불보다는 축축한 물 이미지에 가깝거든요. 그렇다고 역동적인 강이나 광활한 바다, 맑고 통통 튀는 시냇물은 아니고요. 갖가지 사연과 비밀을 안에 담고 있는 듯한, 전설이나 동화에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연못. 그게 바로 우리 음악이 담아내고자 하는 느낌이에요.”
이젠 나름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알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이들은 이제 당당하게 ‘못’으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못’이라 부르고 있다. 연못의 ‘연’에서 이름을 따온 이언(보컬)과 한자로 연못을 뜻하는 ‘지(池)’에서 이름을 딴 지이(기타)는 스스로 ‘연못’ 그 자체가 됐다.
이들이 2집 앨범 <이상한 계절>을 발표한 건 올 5월. 1집 이후 3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왜 이렇게 뜸을 들였을까?
“우린 즉흥적으로 곡을 써내려가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죠. 미세한 차이 하나하나에 스스로 만족감이 들 때까지 만지다보니 결국 이렇게 늦어졌네요.”
공학도 출신다운 작업 방식이다. 이언은 연세대 전파공학과를, 지이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했다. 이들의 곡을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잘 짜여진 구조물처럼 각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작업 방식 때문인지 우리에게 있어 창작은 참 고통스러워요. 그런데도 음악을 왜 계속 하냐고요? 우린 힘들게 만들지만, 우리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결코 음악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죠.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음악은 천국이자 지옥이고, 상이자 벌 같아요. 머리로는 절대 설명이 안 되는 게 음악이에요.”
두 시간 남짓 묵직한 수다를 떨고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그들은 비 오는 밤거리 인파 속으로 물처럼 스며들어갔다. 비가 그치고 나면 연못은 더 깊어져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