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은 나의 힘
본문
1. 한진식
1974년 대구 출생. 중학생 때던가, 고등학생 때던가? 문득 이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 사람이라면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조를 갖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은 ‘한받’.
“내 이름은 한받이요, 하면 대부분 대전을 뜻하는 우리말 ‘한밭’을 먼저 떠올리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통쾌하고요, 또 발음하는 느낌도 좋잖아요.”
그는 한받이라는 이름을 속으로만 간직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새 이름을 만들긴 했으나, 아무도 그를 한받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한진식이었다.
2. 한받
1994년 초 대구 대백프라자 앞에서 서울단편영화제 순회상연회가 열렸다. 고등학생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고 대학에 다니면서도 영화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는 상영회가 끝난 뒤 이 행사를 주최한 영화동호회에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입신청서의 이름 쓰는 란에 ‘한받’이라고 적었다. 속으로만 간직해온 이름을 바깥세상으로 처음 꺼내든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온전한 한받이 됐다.
단편영화를 몇 편 찍었다. 촬영, 편집까지 혼자 해결하다 문득 영화음악까지 해보고 싶어졌다. 영화동호회에서 알게 된 누군가로부터 기타 치는 법을 배웠다. 전수받은 코드는 달랑 4개. ‘C → Am → Dm → G7’만으로도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칠 수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기타를 배운 그날 솟아오르는 창작욕을 이기지 못하고 코드 4개만으로 곡을 하나 뚝딱 만들었다. 지금은 그 곡을 기억 못 하지만.
2000년 초 아는 사람이 만든 벤처기업에 들어갔다. 일하다 보니 영화도 음악도 못하게 된 자신의 신세에 회의가 들었다.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고. 고민 끝에 그냥 내뺐다.
한 달 동안 노숙자 생활을 하다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기타 하나 사서 거리에서 한국말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유랑하며 홍콩까지 갔다. 동유럽까지 가서 집시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빨리 돌아오라’는 누나의 눈물어린 메일을 우연히 확인하고,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3. 아마추어증폭기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에 매진했다. 음악을 할 땐 ‘아마추어증폭기’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 2002년 데뷔앨범 <29세의 자위대>를 제작했다. 사실 그래봐야 집에서 컴퓨터로 10장 찍어낸 게 전부다.
이 앨범을 홍대앞 라이브클럽 ‘빵’에 찾아가 사장님과 당시 무대에서 공연하던 밴드에게 줬다. 이게 인연이 돼 이듬해 빵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2004년엔 그 밴드의 멤버가 운영하는 음반제작사를 통해 2집 <극좌표>도 발매하게 됐다.
아마추어증폭기의 음악은 한 마디로, 독특하다. 거의 모든 곡이 2분 안팎이면 끝난다. 소박하게 뚱땅거리는 클래식 기타 소리는 쓸쓸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토속음악 냄새도 난다. 가장 존경하는 국내 음악인이 ‘강병철과 삼태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들의 노래에는 삶의 애환이 잘 스며들어 있거든요. 전통복장 유니폼을 차려입고 무대를 완전히 장악해 쇼다운 쇼로 만드는 것도 좋고요.”
아마추어증폭기의 유니폼은 가발과 튀는 무대의상이다. 처음엔 커트 코베인을 흉내 내느라 쓴 가발이 이젠 그의 상징이 돼버렸다.
“유니폼을 입어야 슈퍼맨, 스파이더맨이 되듯 가발을 써야 비로소 아마추어증폭기로 변신하는 거죠. 치마에 스타킹을 신거나 원색의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제 음악을 관객에게 들려주는 의식에 맞게 나름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는 지금 한국영화아카데미 조교로 일하며 틈틈이 단편영화 작업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편영화만 스무 편 이상 찍었다. 모든 걸 혼자 도맡다보니 편당 평균제작비는 5만원.
“영화도 계속 하고 싶긴 한데, 산업 자체가 워낙 메이저가 돼서…. 그래도 단편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어요. 음악이요? 지금까지 350번 정도 공연을 했는데요, 1000회 공연을 할 때까지 계속 해야죠.”
그는 내년에 발매할 4집 앨범에는 117곡을 담을 거라고 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정말이라고 강조했다. CD 3장에 나눠 담을 예정이라는데, 벌써부터 궁금하다. 얼마나 내 뒤통수를 후려칠지.
-2집 <극좌표> 첫번째곡 '금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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