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레드포드의 미개봉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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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중에 영화사에 획을 긋는 좋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5분에 한명씩 죽거나 영웅에 대한 이야기거나 주인공이 죽을 뻔하다가 사랑의 힘으로 살아나는, 그 다음 장면이 금방 예측되는 경우입니다.
오늘은 그런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 꾸준히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35년 전, "내일을 향해 쏴라"를 통해 선댄스 키드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대통령의 음모"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알린 사람입니다. "추억", "아웃 오브 아프리카", "업 클로즈 앤 퍼스낼"을 통해 자유로운 로맨티스트로 명연기를 펼치기도 했지요.
그러나 제가 레드포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감독 데뷔작인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 1980)"을 보고 난 다음부터이지요.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이지만, 중년 가정 내에서 일어난 아들의 사망을 두고 겪는 가족구성원들의 치밀한 내면 묘사는 참 신선했습니다.
그 후 만들어진 "흐르는 강물처럼"은 매년 이 맘 때에 목욕재개(?)하고 보는 영화가 되었지요. 길을 가다가도 "흐르는 강물처럼"의 DVD 타이틀이 3천원에 팔리고 있으면, 5개씩 사서 주변에 나누어 주고는 합니다. 2004년 겨울날, 의과대학 학생들을 꼬드겨 시험 전날 데리고 간 "모토 싸이클 다이어리" 의 엔딩 크레딧에 제작자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30년 넘게 지켜본 한 사람의 영화가 저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낍니다. 일전에 리영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정연주 기자(현 KBS사장)의 책 서문으로 기억합니다.
말은 천리를 달려야 그 가치를 알 수 있고 사람은 30년을 겪어봐야 그 진실성을 느낄 수 있다.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걸 의미하고, 한 세대를 결정짓는 지표이기도 한 긴 시간입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영화배역의 이름을 딴 "선댄스 영화제"는 그의 새로운 이력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전 세계 독립영화제의 대명사가 된 이 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감독과 영화가 발굴되었지요.
스티븐 소더버그, 코웬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등은 물론이고, 한국의 박철수, 이명세 감독도 이 영화제를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의 대부인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 초청되고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레드포드의 역사를 적으면서 한국 영화계에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 '보통사람들'은 개봉도 못해본 것이며, 최근 주연으로 출연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끝나지 않은 삶(An Unfinished life, 2005)"은 1년이 지나도록 수입계획이 없습니다. 작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관객이 들지 않기 때문일까요?
두 영화 모두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에서는 장기 상영되고 지금도 스테디 DVD로 팔리는 작품입니다. 특히 "보통 사람들"은 1981년에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우수한 영화입니다. 또한 '끝나지 않은 삶'의 포스터는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지하철에서, 싱가폴의 대중 영화관 광고판에서, 동경시내의 영화탑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호평되는 영화가 유독 우리에게만 걸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우리 영화계가 지닌 고질적 상업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김기덕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상호 연결된 것이기도 하지요.
레드포드의 영화는 개인에 초점을 둡니다. 번잡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카메라 앵글은 자연과 사람을 맞추어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것처럼 태양빛이 어른거리는 강물과 묵직한 오른손의 움직임(흐르는 강물처럼), 집 앞의 낙엽 쌓인 정원과 커피를 마시는 여린 손(보통 사람들), 멀리 보이는 산과 비석, 그 위에 드리워진 상처 깊은 손등(끝나지 않은 삶)은 자연이라는 거시적 환경과 더불어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작은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를 통해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우리는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용서는 헐리우드 식의 '쿨'한 것이 아니라 미움이 목까지 차오르고 다시는 상대방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반복행동을 통해 조금씩 가라앉게 된다는 그런 것들입니다.
이 글을 통해 DVD 타이틀을 만드시는 분들이 "보통 사람들", "흐르는 강물처럼", "끝나지 않은 삶"을 묶어 사랑과 용서에 대한 삼부작으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근데 "보통 사람들"이 KBS에서 공중파를 통해 1988년 2월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날이었을까요? 바로 "보통 사람(?)"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 이었습니다. 통치권자 한 사람의 입맛에 맞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영화마저도 모욕을 당하던 그런 코미디 같은 세월을 거쳐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 역사는 진화하는 것이겠지요. 좋은 한가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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