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는 우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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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망원경은 고사하고 안경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는데 처음 철학했던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별’ 볼 일이 많았을까? 그리고 이 분들은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본 정도가 아니라 하늘 꼭대기에 서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보지 않으면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그런 말들을 겁도 없이 불쑥불쑥 내뱉었다.
앞서 말한 아낙시만드로스라는 복잡한 이름의 철학자도 그렇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원물이 ‘토 아페이론’, 즉 무한자라고 했다지만 그 물질을 실제로 사람들 앞에 보이면서 그것이 이런 모양으로 생기고 저런 성질을 가졌으며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물론 아낙시만드로스는 기록된 인간의 역사에서 최초로 ‘실험’이라는 것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긴 하다. 유명한 천문학자로서 미국 우주계획의 중요 설계자 중 한 분이었던 카알 세이건은 80년대의 과학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아낙시만드로스를 인류 최초의 실험과학자로 묘사하고 있다.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친구이며 동료이기도 했는데 그는 실험을 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수직으로 세워놓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조사하여 1년의 길이와 계절을 정확하게 알아냈다. 인간은 오랜 동안 막대기로 서로 때리거나 찌르거나 할 뿐이었는데 아낙시만드로스는 막대기를 사용하여 시간을 측정하였다.
하지만 세이건 선생의 추정대로 아낙시만드로스가 순전히 관찰과 실험의 결과에 충실한 ‘과학자’일 뿐이었다면 앞서 말한 식으로 이 우주 전체는 자기가 생겨난 그곳으로 필히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식의 고매한 얘기는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이야 바로 해야지. 아낙시만드로스 그 양반 아무리 막대기로 희한한 일을 했기로서니 자기가 직접 이 우주 사물 전체가 없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닐 거 아니야! 그거 다 보고 얘기하려고 했다간 지금까지 살아 있어도 못하지.”
그래도 현대 과학이 작업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아낙시만드로스를 감싸려고 이런 식으로 변호해 줄 수는 있겠다.
“아니, 그렇게 무식한 소리 좀 작작하시오. 당신처럼 그런 식으로 했다간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이나 법칙 중에 믿을 것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소. 이 세계의 자연현상을 모두 겪어보고 나서 한마디 하라니. 아 ‘가설’이라는 게 있잖아. 당장 진리는 아니더라도 일단 지금까지 겪은 거라도 올바로 설명하면 더 그럴 듯한 게 나올 때까지는 맞다고 믿어도 무방한 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밤이 새도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가 한 짓을 가만히 더 살펴보면 자기가 한 말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이 당시 처음 철학을 시작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 어떤 가설을 세운다기보다는 나름대로 확고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물, 그 가운데서도 인간이 생겨난 것을 다른 사물이 생겨난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한 것 같다. 앞에서 필자가 조심스럽게 얘기했지만 생겨났다 없어지고, 생겨난 것은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똑같은 모습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어떤 기계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생명체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생명체 중에 대표격인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엄청난 주장을 했다고 한다. 즉 인간이 처음 갓난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참으로 무력하다. 따라서 만약 최초의 인간의 어린이가 자기 힘으로 이 세상에 왔다면 그 아이는 즉시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살며 활동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그런 능력을 인간보다 먼저 갖춘 동물로부터 발전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사정없이 더 나가다 보면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생각이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어찌된 연유인지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명은 진흙 속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설을 (또는 ‘썰’이라고 해도 좋은데)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최초의 동물은 등뼈가 있는 물고기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러한 물고기의 자손 중에서 물을 떠나 뭍으로 올라온 것이 있으며, 그것이 점점 형태가 변해 여러 동물로 진화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이른바 진화설이라는 것은 19세기에 와서 영국의 챠알스 다윈이 십수년간에 걸쳐 비이글 호라는 돛단배를 타고 갖은 고생을 해가며 전 세계를 여행해 보고 나서야 자신감을 갖고 내놓은 이론이다. 기껏해야 잔잔한 호수같은 지중해 바다에서, 가봤자 이집트 정도나 가봤을 고대인의 머릿속에서 별다른 관찰자료도 없이 어떻게 이런 현대 생물학 뺨치는 발상이 나왔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이쯤되면 현대를 사는 우리가 2천 5백년 전의 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그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철저하게 ‘나’라는 단위로 생각한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그리고 자연을 대할 때 우리는, 나는 ‘인간’이고 ‘자연’과 아무 상관없으며, 설사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아주 별종으로 여긴다. 이런 틀에서 보면 자연은 철저하게 ‘나’의 관찰이나 이용의 ‘대상’이지 자연과 인간인 나를 같은 동아리로 공감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래서 자연은 그 자체 생명을 갖고 활동하는 ‘생명체’라기보다는 수학적으로 공식화된 물리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기계나 아니면 기껏해야 화학식으로 표시되는 생리과정 등의 ‘체계’로 파악된다. 자연을 그렇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단 고도로 발전한 수학이 있어야 하고, 자연으로 하여금 그 진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엄청난 관찰기구나 실험도구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철학을 처음 시작한 이들이 이런 현대적 의미에서의 과학자였다면 그들은 절대 우주 전체의 원물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할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하늘의 별을 보더라도 기껏 맨눈으로 보는 판에 어떻게 자기가 본 것이 같은 맨눈으로 보는 보통 사람들 것보다 더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믿게 할 수 있었겠는가? 어쨌든 초보적인 기하학의 원리를 하늘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철학을 시작한 이들의 주장은 기하학의 적용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이 점은 역시 아낙시만드로스의 직접 후배인 아낙시메네스(B.C.585?-525?)의 주장을 들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자체 공기인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모두 움켜싸고 있듯이, 호흡과 공기가 전체 우주를 감싸고 있다. 공기는 거의 아무런 물체적 형상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는 이 공기에서 뿜어나온 분출물로 생겨나기 때문에 공기는 아무런 한계가 없으며, 결코 퇴락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아낙시만드로스 때와 달리 여기에는 공기가 한계가 없는 것, 즉 ‘토 아페이론’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동시에 이 공기는 우리의 호흡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낙시메네스는 바로 이 공기가 우리의 영혼이라고 했다. 말의 참·거짓을 떠나 우선은 아낙시메네스가 그린 대로 따라가 보자.
이 공기가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다면, 이 공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은 우주 전체와 통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주가 호흡하는 것과 똑같이 호흡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주를 숨쉬는 것이다.’ 이것은 수학공식을 통해 우주를 재단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이 우주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우주와 인간이 똑같은 생명을 살고 똑같은 숨을 쉬고, 바로 그 똑같이 숨쉬며 내뱉는 공기를 통해 우주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하나의 계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우주는 단지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진흙덩어리에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체의 계열로 이루어진, 그 자체 하나의 생명체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우주생명의 일부이다.
내가 하늘의 별을 보고 해와 달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과 해와 달은 나의 생명이며 나와 더불어 숨쉰다. 그리고 진흙덩이에서 물고기, 등뼈를 가진 모든 동물은 단지 내가 산지에서 직송하여 싱싱하게 먹을 횟감이나 바비큐로 구워먹을 요리감이 아니라 내 생명의 과거로서 그 자체 내가 자라면서 거친 나의 일생이다. ‘이 우주에서 인간의 생명은 결코 고립되어 생겨났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 내가 살았던 삶의 흔적들이며, 이런 의미에서 나의 현재는 언제나 나의 과거, 그리고 나의 미래와 같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공존의 의식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이란 기독교의 성경에서 나온 것과 같이 과거에서 미래로 오직 한 방향을 따라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그런 것이 아니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곧 우주이다.’ 따라서 나의 삶은 우주의 모든 공간에 걸쳐 살아지는 것이며, 우주의 모든 시간에 걸쳐 바로 지금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그런 흔적을 남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진흙덩이에서 생명이 나왔다고 했을 때 그가 현대의 우리처럼 무슨 과학적 증거를 갖고 그런 주장을 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순전히 우주적 확신에 입각하여 그 확신에 걸맞는 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모든 현상에 나의 영혼이 통하고, 내가 곧 우주이며, 우주의 삶이 곧 나의 삶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때까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종족을 지배하던 한 가지 사고방식과 철저하게, 그리고 위협스럽게 결별해야 했다. 그것은 곧 이 우주가 전적으로 신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인간의 운명까지 포함한 우주의 모든 현상이란 신들의 조화일 뿐이라는 신화적 사고방식이다. 결국 철학은 이 우주가 신의 지배질서가 아니라 자기 나름의 이법에 따라 움직이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자율적 조화의 질서라는 확신이 섰을 때 자기 생명의 비밀을 캐내려는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 이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UFO를 타고 온 외계의 우주인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우주의 생명을 타고났다고 믿는 우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보통 그리스인들에게 이 철학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답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글을 거꾸로 놓고 페이지 아래쪽에 찍힌 것을 보시도록.
E.T.처럼 보였겠지!
글/ 홍윤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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