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없어짐, 그것도 제대로 철학의 첫번째 생각거리
본문
필자는 서양 그리스에서 철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어떤 것이든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처음 알고 싶어 했던 것이 ‘그 모든 사물이 <왜> <지금 있는 그대로>인가’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모든 사물이라고 하면 단지 자연현상이나 물건, 아니면 식물이나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하는 말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여러 형태의 신까지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작자들이 딱딱한 돌멩이가 <있다>, 꽃이 피어 <있다>, 말이 뛰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점은 참으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써 먹기>바쁘다.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은 ‘써먹을 것’이다. <그저 있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잘 써먹으면 됐지, 그것이 왜 있는가를 알 필요는 조금도 없으며, 알아봤자 써먹는 데 더 보탤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있느냐고? 참 별 볼 일 없는 한심한 작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그야말로 별이나 보고 말 일이지, 그것도 알거라고 입초리에 올려? 철학단상을 피력한다고 해서 어디 써먹을 말이나 한마디 들으려고 했더니 그만 둬야겠어. 친구나 후배들, 아니면 공부하라고 격려해준 어르신네들의 짜증난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당장 밥줄 끊기게 생긴 필자로서는 좀 다급해졌다. 그래서 한 마디 더 올려야겠는데 통할 말인지 모르겠다. 이 그리스의 첫 철학자들은 ‘<모든 것>이 지금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말만 되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잘 있는 바로 그런 상태를 코스모스(cosmos), 즉 ‘우주’라 했다고 유식을 한번 떨어 보았다.
<제>자리라! 그건 좀 말이 된다. 우리로서도 써먹으려던 물건이나 인간이 <제>자리에 없으면 아까 물었던 그런 하나마나한 질문을 들을 때보다 더 짜증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리 박차고 떠나려는 사람들 가운데 반쯤은 그야말로 <제>자리에 <도로>앉혔다.
우스개 소리 겸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머지 반은 절대 <제>자리에 도로 앉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수중에 돈이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써먹을 것이 제자리에 없다고 해서 그걸 찾아보겠다고 필자가 하는 흰소리를 듣겠다고 이왕 엉덩이 뗀 자리에 도로 앉을 사람이 아니다.
이유야 간단하다. 써먹어야겠는데 제자리에 없는 물건이라면, 아니면 인간이라면, 그거야 나가서 돈주고 사면 되지, 네 얘기를 들어? 내가 써먹겠다면 물건 아니라 몸뚱아리라도 팔겠다는 사람이 바깥에 쌔고 쌨는데.
그래서 철학을 잘 하거나 잘 들어주는 사람 중에 돈 많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이들은 철학할 시간을 돈 버는 데 쓰거든. 이들에게 <없는 것>이란 <사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는 없는 게 없다.
불행하게도, 아니 지금 철학으로 당장 밥 벌어 먹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철학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당장 눈 앞에 없다고 해서 돈 주고 그걸 다시 사들일 <바깥 상점>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있는 것은 꼭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제자리에 없는 것은 나쁜 것으로서 있게 해야 했으며, 그래도 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는 뭔가 천벌이 내려 마땅했다. 그런데 또 그래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할 수 없지. 그렇다면 그것은 마땅히 <없어져야> 했다.
자, 그렇다면 왜 이 딱딱한 돌멩이가 <있으며>, 왜 이 꽃이 피어 <있고>, 이 말은 왜 뛰고 <있고>, 그리고 이 잘난 인간은 왜 살고 <있는가>? 이미 앞에서 필자는 탈레스 선생이 모든 것이 물을 기본으로 하여 물이 있는 방식으로 생겨났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제자가 선생보다는 자신이 없었는지 탈레스의 후배 아낙시만드로스라는(좀 이름이라도 짧아보지 원!) 긴 이름을 가진 양반이 선생처럼 뭐라고 꼭 집어 이 세상이 이거다 라고 얘기할 능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있다>고 얘기할 만한 것을 몽땅 털어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어느 하나의 원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고 각각이라 이 분은 아예 속 편하게 그 모든 것이 ‘토 아페이론’(to apeiron)에서 나왔다고 말해버렸다.
토 아페이론이라고 그리스어로 한 마디 하니까 모드들 ‘야! 이 작자 희한한 물질을 다 알고 있었네!’ 하고 감탄하고, 그 말을 옮긴 필자는 한껏 유식을 떨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겁없이 외래어나 읊조리는 자를 항상 조심할 지어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그 외래어가 무슨 뜻이었냐고 물어볼 일이다.
좀 말하기 쑥스럽지만 (그러나 철학하다보면 쑥스러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이 말을 생짜배기 우리말로 옮기면 ‘가이 없는 것’, ‘무한한 것’, 그래도 마지막 유식스러움을 지키려고 한자로 옮기면, ‘무한자(無限者)’가 된다. 그래서 철학의 역사에서 처음 제대로 적은 글귀라고 하는 이 아낙시만드로스 선생의 고견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무한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의 원물이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이 ‘생겨 난 그 곳’ 이 바로 사물들이 소멸할 때, 필연적으로, 되돌아가는 곳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서로를 ‘올바름(정의)’으로 대하는데, 그들 사이에 올바르지 못한 일(불의)이 일어나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벌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 글귀를 곰새겨 보면 이 세상에는 마치 정의를 관장하는 신이 있어서 만일 책상이라도 잇게 되면, 그것이 올바로 세워져 있을 경우에는 그냥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지만, 삐딱하게 서 있을 경우에는 채찍이라도 갈겨 제 자리에 놓아주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리고 말 그대로라면 모든 것이 무한한 것에서 생겨났다가 다시 거기로 되돌아간다는 이 말에는 사실 아무 뜻도 없다.
그 말은 우리 앞에 놓인 사물이나 인간이 저 넓은 세상 어디에선가 생겨났다가 다시 그 생겨난 저 넓은 세상으로 되돌아 간다는 식의 아주 도통한 듯한 사람의 말재간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디에선가 생겨낫다 다시 또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도 여기에서 한 마디 건질 것이 있다면, 어떤 사물이나 인간이 <왜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의 틀 정도는 보여준다는 것이다. 위의 글귀에 따르면, ‘<어떤 것이 있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그것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즉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유식한 철학의 전문용어를 동원하자면, ‘있다(존재한다)는 것은 생겨난다(생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상 왜 있지?”하고 물으면, 당연히 “이 책상이 생겨났기 때문에 있지”하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 하나 붙잡고 “너 왜 있냐?”하고 물으면 “임마, 그야 내가 생겨났기 때문에 있지”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답은 대답이 아니다. ‘왜 있지’라는 물음에 ‘생겼기 때문에 있지’라고 대답하는 것은 약올리는 대답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아닌 대답이 나오도록 만드는 대답 그 자체를 질문에다 다시 걸었을 경우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 아주 달라진다는데 철학의 묘미 내지는 함정이 있다.
치미는 약발을 잠시 참고 “너는 왜 생겼지?” 하고 다시 묻는다고 치자. 그래도 “그야 내가 생겨났기 때문에 생겼지” 라고 대답 하면, 그야말로 이 대답은 대답이 아니고, 그 때에는 정말 한 방 쥐어박아도 대답하는 사람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동어반복(同語反覆)이라고 표현되는 이런 식의 대답이 대답이 아닌 것은 대답하는 사람 자신이 잘 안다.
적어도 그가 묻고 대답하는 데 성실히 임하려면 대답 속에는 묻는 것과 연관하여 묻는 것에 들어있는 것보다 적어도 하나 이상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여 스스로 자신이 무식함을 인정해야 한다. (안다고 뽐내는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굴욕이다.)
따라서 “너 왜 생겼냐?”하는 물음은 더 이상 대답하는 사람을 도망갈 수 없게 만들면서 자신이나 아니면 관련된 사물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없을지 찾아나서게 강박한다. 즉 이 질문은 “네가 어디에서 생겼으며, 무엇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생겨난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생겨났으면 언제, 어디로 없어질 것인지” 등등 마치 고구마순이 넝쿨 채 걸린 듯이 하나하나 꼭 집어 대답해야 할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이 줄줄이 달려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윗 글귀가 마치 인간 세상에서 죄와 벌이 오가듯이 이 우주의 질서가 잡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물을 이렇게 ‘생성과 소멸의 틀’ 안에서 보기 시작했다는 것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당연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 운동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이렇게 운동하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 안에 ‘생명이 약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을 무한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이 우주라면,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의 또 다른 글귀처럼 “이 무한자는 영속하며 세대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고”, 나아가 “이 무한자는 불멸하며 결코 소멸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 사물들이나 인간들은 그 자체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이 우주 자신의 생명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우주가 반듯하게 살아 움직이려면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제자리에 올바르게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 우주가 병들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그렇게 삐딱하게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당장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모든 것이 반드시 올바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장치를 하나 달아놓는다. 즉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말하자면 아무리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뻗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짐”으로써, 이 우주는 자신의 질병을 스스로 치료한다고 보는 것이다.(계속)
글/ 홍윤기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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