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더디게 살아갑니다
본문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여성들이라면 모름지기 아이를 낳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고, 남성들이라면 가족부양 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오늘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일전에 용서에 대한 벨기에 영화 ‘아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100분 내내 배경음악 하나 딸려 나오지 않고, 숨가쁘게 주인공의 목덜미를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엔딩크레딧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바로 그 영화 말입니다. 마르크시즘과 리얼리즘에 철학적 배경을 지닌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지독하게 재미없는 영화 ‘더 차일드(The Child)’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2005년 깐느영화제는 유례없이 다르덴 형제에게 두번째의 황금종려상을 수여하였습니다. 왜 이토록 재미없는 영화가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영화가 무척 많습니다. 또 봐야할 영화도 많구요. 그러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재미도 없고 꼭 봐야할 영화가 아닙니다. 보면 볼수록 우리 내면의 부끄러움이 들통나버리고 심리적 공황에 빠지기 때문에 보고 난 뒤에 마음이 늘 허접할 뿐입니다. 하지만 매일 우리 내면의 모순에 순응하며 일상을 살아가듯 오늘도 저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매우 거북하게 보고 있습니다.
‘더 차일드’에는 십대 소년 브루노가 등장합니다. 벨기에 북쪽의 쇠락해가는 공업도시 한켠에서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산업화 그늘의 어두운 자식입니다. 그런 그에게 아이가 생깁니다. 여자친구 소니아는 기쁘게 아기를 안고 그를 찾아오지만 철없고, 아니 사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던 브루노는 장물을 대하듯 아이를 인신매매조직에 팔아버립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소니아의 모습을 보고 뒤늦게 자신의 죄를 알아차린 브루노는 아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일은 계속 꼬이게 됩니다. 아이를 찾아도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신매매 조직의 협박을 받으며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고, 브루노는 또 다른 범죄에 연루되어 결국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마지막 시컨스에서 브루노는 처음으로 소니아를 보며 말없이 울고 영화는 멍한 상태에서 끝이 납니다. 물론 배경음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요.
불편한 관객들의 마음속에 전혀 친절하지 않은(?) 다르덴 형제의 ‘이제 집으로 가야지’라는 퉁명스러운 엔딩크레딧이 올라갑니다. 그래도 전작 ‘아들’보다는 숨이 덜 가쁩니다. 아마도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임에 분명합니다.
인간은 본디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유전체의 집합입니다. 원래 코드 자체가 놀기 좋아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것 혹은 남녀가 짝을 지어 논다는 것은 인간 유전체의 심각한 결함입니다. 사랑이 심어지는 순간부터 인간의 본성은 변하게 되어 있지요.
자신 못지않게 남을 위해야 되고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배우게 됩니다. 더욱이 아기가 만들어지고 탄생하게 되면 이 세상은 더욱 순탄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자유가 줄어들며 책임만이 존재하게 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인간은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브루노의 행동은 윤리라는 잣대, 결혼과 출산이라는 제도를 없애버리고 본다면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지요. 그러나 여성은 다릅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의 몸속에서 도출해내는 고도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승화됩니다. 브루노와는 달리 소니아에게서 아이는 자신의 확실한 분신입니다.
이는 유전학의 견지에서도 모계의 혈통이 생식에 절대적임을 입증합니다. 이미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은 본성적으로 엄마되기에 익숙해지지만, 남성들은 후천적으로 길들여지고 자신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아빠가 될 뿐입니다.
흔히들 인간사회에서 아빠없는 아이들(fatherless child)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성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것들, 훈련이나 의무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행동을 강화시킬 명분이 사라지면 소거됩니다. 이렇듯 갑자기 ‘아버지 되기’에 당혹하며 혹독한 과정을 통해 삶의 어려움을 소중하게 얻어가는 소재는 과거 ‘세남자와 아기바구니’에서부터 최근의 ‘브로큰 블라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속에 녹아 있습니다.
‘더 차일드’는 비단 철없는 청년의 아버지 되기에 대한 영화만은 아닙니다. 아기라는 상징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는 용서와 화해에 대한 영화입니다. 전작 ‘아들’을 통해 용서라는 과정이 결코 너그러움의 결과가 아닌 바닥을 드러낸 분노와 좌절의 이면임을 다르덴 형제는 보여주었습니다. 브루노의 눈물은 뉘우침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노였으며 소니아의 용서는 인간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좌절일 뿐입니다.
저는 40대에 들어서야 천천히 이 세상을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 아이의 아빠로써 이제야 진정한 ‘아버지 되기’에 입문했다고 느낍니다. 이 영화를 보며 아이에 대한 무관심이 브루노의 행동을 통해 표출될 때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 영화의 표제처럼 아프지만 더디게 느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빠가 되려는 사람 혹은 이미 아빠가 되었지만 자신의 정체감이 덜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아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소중한 산물임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