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휠체어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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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라는 광고가 요즘 유행하고 있다. 미녀들이 왜 석류를 좋아하는지 미남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않게 방송 카메라도 휠체어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앞에 나타나면 카메라는 마치 30년 만에 정든 친구를 만난 듯, 만나자마자 휠체어 바퀴에서부터 장애우의 머리까지 훑어주고, 휠체어가 움직이면 졸랑졸랑 따라가며 구석구석 자세히 보여준다. 헤어질 때도 떠나는 게 그토록 아쉬운지 먼발치로 사라질 때까지 카메라는 휠체어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휠체어를 이토록 오매불망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추적해보자.
사람보다 장애가 부각되는 카메라의 시선
얼마 전 복지TV에서 재방송되는 <도전 죽마고우>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프로그램은 작년에 EBS에서 방영된 것으로 장애우와 비장애우들이 서로도우며 이해를 증진시킨다 하여서 커다란 상까지 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그 작품 속에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휠체어의 뒷모습부터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퀴에서부터 손잡이 윗부분까지 훑어서 보여주며 먼발치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끝까지 따라간다. 장애우라면 그 휠체어가 무슨 종류이며 얼마짜리인지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마치 홈쇼핑에서 휠체어를 팔기위해 광고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이것은 비단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에만 국한 하지 않는다.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우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목발 밑 부분부터 겨드랑에 위치한 부분까지 세심할 정도로 묘사하고 그 장애우가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도 친절하게 보여준다. 어디선가 쇼핑호스트가 나타나 이 목발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값은 얼마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정작 장애우의 얼굴은 휠체어, 목발 등을 자세히 훑고 난 뒤에 보여줘서 장애우가 휠체어나 목발에 딸린 부속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 프로그램은 분명히 휠체어를 파는 홈쇼핑이 아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휠체어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집요한 휠체어에 대한 카메라의 사랑은 주변에 비장애우가 나타나는 순간 휠체어를 차버리고 비장애우에게로 달려간다. 비장애우가 나타나서 장애우를 업고, 들고, 휠체어를 밀어주는 모습을 발견한 카메라는 흥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간다. 시청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 감동을 받게 되며 따라서 시청률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장면은 워낙 중요해서 그냥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돕는 사람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번 KBS <인간극장>에서 골형성부전증으로 뼈가 53번이나 부러졌다는 소년을 부모가 앞뒤에서 들고 가는 장면이다. 여기서 해설은 아이가 53번이나 뼈가 부러져서 부모가 이렇게 힘들게 고생을 한다는 것을 방송하는 5일 동안 수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53번이나 뼈가 부러져서 엄청난 고통을 받아왔을 아이의 심정은 매정하게도 한번도 말해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분명히 장애소년인데 시청자들은 그 아이의 심정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리고 장애우가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운전하는 능동적인 장면은 거의 외면한다. 대신에 비장애우가 장애우를 업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감동을 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간다.
이러한 주객전도 현상은 카메라의 눈높이에서도 드러난다. 비장애우가 옆에 등장하면 카메라의 높이는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지기 때문에 비장애우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휠체어를 타서 내려다보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 장애우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작고 왜소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방송카메라는 왜 이토록 휠체어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방송제작진들이 비장애우들로만 구성돼 있으므로 그들의 시각으로 장애우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제작진들이 보기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를 볼 때 장애우 보다 휠체어가 먼저 눈에 들어 올 것이다. 그들 눈에는 장애우가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휠체어가 없으면 못 움직이는 불쌍한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장애우를 삶의 주체로 보기보단 휠체어나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비주체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휠체어부터 보여주고 주인공 장애우 얼굴은 자연히 다음으로 밀리게 되고, 비장애우와 같이 있는 장면에선 장애우를 돕는 모습인 업는 것, 휠체어를 미는 것 등 비장애우들이 돕는 모습만 강조해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장애우가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나, 장애우 앞에 놓인 열악한 사회구조, 장애우의 심정 등은 별 흥미를 못 느낀다. 자신들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장애우들이 절실히 느끼는 열악한 사회구조도 비장애우 제작자들 입장에선 전혀 와 닿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비장애우들의 시각"에서 촬영된 장애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우가 휠체어와 비장애우의 도움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간다고 눈물겨운 박수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올리버스톤 감독의 1989년 영화<7월4일생>에도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가 등장한다. 월남전에서 부상을 당하여 휠체어를 타게 된 장애우를 그린 영화인데 우리나라의 카메라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장애우를 바라보고 있다.
첫째 휠체어를 비추고 장애우 얼굴을 나중에 보여주는 장면은 한번도 없다. 영화는 휠체어 홈쇼핑 하는 내용이 아니므로 휠체어를 훑는 장면은 없으며, 주인공이 엎드리거나, 넘어지는 경우 외에는 휠체어가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찾기 어렵다.
두 번째로 카메라의 눈높이는 언제나 휠체어를 탄 주인공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장애우를 무시하듯 머리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은 없었으며, 비장애우가 서 있는 경우에는 언제나 주인공이 휠체어에서 올려다보는 높이로 보여준다(필자도 휠체어를 타기에 늘 이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세 번째로 비장애우들이 도와주는 장면인 업히거나 안겨서 다닌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인공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열차도 자주 이용하는 내용이지만 안기거나 업혀서 다니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면 주인공을 불필요하게 의존적으로 보이게 하고 동정심을 유발해서 이야기의 초점이 인간자체 보다는 장애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방송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7월4일생>같이 장애우를 주체적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전혀 없는가! 있기는 있었다. 작년에 SBS 드라마<프라하의연인>에서 휠체어를 타는 장애우를 <7월4일생> 못지않게 그려냈었다. 장애우의 눈높이에 위치한 카메라, 장애우의 얼굴을 늘 먼저 보여주고,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의 장애우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미국과 우리나라가 다른 점은 미국은 올리버스톤감독이 장애우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지니고 있어서 그와 같은 장애우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란 사실이다. 미국 장애우법에 "장애를 소재로 제작하는 영상물에는 반드시 대상 장애우들과 6개월 이상 생활해야한다", "장애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등 구체적인 조항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었고 모든 영상물은 법조항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구체적인 법조항이 없기 때문에 <프라하의 연인>에서 같은 장애우 모습을 다른 모든 영상물에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제작진의 장애우에 대한 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비장애우들이 장애우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지금의 사회구조 속에서는 <도전 죽마고우> 같은 영상물들만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같이 구체적인 법적 제제 조항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장애의 고통에 힘들어하고 비장애우의 온정에 의존하는 비주체적인 장애우의 모습만을 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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