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비만 오면 지뢰 걱정으로 안절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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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폭우로 홍수에 지뢰가 떠내려와 인천 세어도 해변가에 피서 나온 신동권 씨의 엄지발가락이 잘려나간 사고가 발생했다. 그지역 분만 아니라 경기도 파주지역 부근에서도 지뢰의 노출과 사고발생 가능성이 보도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사태는 한편으로 민간인들에게도 쉽게 노출되고 있는 지뢰 피해의 심각성이 새삼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지난 9월 22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는 국내에 있는 대인지뢰 피해자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꾸려 1차로 경기도 연천군 백학 지역을 다녀왔다. 1차 조사단으로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진교육연구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서가 참여했다.
지뢰밭에 아이들 놀이동산 만들어
경기도 연천군 일대에 살고 있는 지뢰 피해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지만 국방부에 요청해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백학면 노곡1리로부터 들렀다. 먼저 지뢰 피해현황을 알기 위해 노곡1리 이장댁을 찾아갔다.
“이 지역은 큐바사건(66년) 때 국군의 지뢰를 묻었어요. 바로 앞에 있는 산이 발리산인데 그 중 일부가 저희 집안 사유지예요. 1평당 20만 원하는 사유지 중 1천평에 지뢰를 묻어 놓고 벌써 30년이 지나도록 지뢰를 제거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지뢰를 제거해달라고 ○○사단과 군수에게 민원을 올렸는데 ○○사단측은 지뢰를 제거 하는데 위험이 따라 제거할 수 없다며 거절을 해 현재 이 땅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장댁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더니 이장댁 바로 왼쪽이 마을 입구고 오른쪽이 버스정류장이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개발만 한다면 이용가치가 높은 곳이다.
그런데 이장댁에서 채 1백미터도 안 되는 지점에 노곡 주유소와 노곡 교회가 들어서 있다. 지뢰매설 지역인데 어떻게 해서 건물이 들어섰을까?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군에서 지뢰를 제거해주지 않아 주유소 주인이 직접 사비를 들여 20여년 전에 전문가를 불러 지뢰를 제거했고 노곡교회는 지뢰 매설지역에 흙을 1미터 높이로 쌓아 동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지뢰피해서 박경제(53) 씨 댁을 찾아갔다. 허름한 집에서 노모와 단둘이 살고 있는 박 씨는 마을 친구분과 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 씨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73년 11월 4일 사고를 당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박 씨는 당시 다른 집에서 머슴으로 갔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에 칡을 캐러올라갔다가 지뢰가 폭파하면서 오른쪽 발이 패이고 왼쪽 눈을 실명(시각 1급) 했다. 지뢰매설 지역에 들어가 사고를 당한 것인데 그곳에 지뢰금지 구역임을 표시하는 철조망이 없었냐고 묻자 “철조망을 쳐놓기는 했지만 다들 하도 어려운 시기여서 철조망까지 뜯어다 팔아먹은 형편이라 철조망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철조망이 쳐 있어서 나뭇잎과 풀이 우거져 표시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곧이어 건너편에 살고 있는 이민상(65)씨를 만났다.
“73년 8월 3일 홍수로 평화의 댐이 무너졌지. 그 때 우리 논도 물에 잠겼는데 비료값이라도 건지자고 애들이랑 같이 논에 나왔지. 그런데 우리 참외밭에 군인들이 새까맣게 덮였어. 구둣발로 논을 막 밟는 거야. 실종된 군인을 찾는 중이었지. 나는 애들 먹으라고 참외 수박을 양동이에 담았지. 그 때 보니 지뢰도 있던데 녀석들이 보면서 안 치우고 그냥 철수하는 거야. 애들이 밭에 들어가서 노는데 그냥 두면 사고 날게 뻔하잖아.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죄다 마차에 싣고 가다가 지뢰가 터진거야. 그 때 형제들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 내 형제 동기간들이 날 살린 거야. 근처 연대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역전 앞 연천병원에 입원해서 석 달 열흘만에 퇴원했지. 치료비가 3백80만원이 나왔는데 의료보험의 적용이 안되더라구.”
앞서 만난 박 씨에 비해 가정형편도 낫고 많은 형제와 동기간 사이에서 위로받으며 살아서 그런지 이민상 씨는 그 때 상황을 조금도 여유있게 그러면서도 아주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일이 안돼 속상할 때면 동생들에게 “이 자식아, 그 때 가만뒀으면 내가 죽었잖아”라고 화풀이하며 서로 붙들고 운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조인행(59) 씨도 중학교 1학년 때 지뢰를 가지고 놀다가 돌로 지뢰를 쳐서 팔을 절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 관계산 직접 만나지 못했다.
지뢰밭도 아닌데 지뢰가 있었다
다음으로 조사단이 찾아간 곳은 대광 2리다. 국방부에서 준 자료에 따르면 비교적 가장 최근에 사고가 났고 군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김일복 씨가 대광 2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곳 역시 홍수 때 지뢰가 흘러 들어와 피해를 입은 경우였다.
그러나 물어 물어 찾아간 집에는 김일복 씨는안보이고 노모와 딸, 사위, 손자만이 있었다. 조사단은 취지를 설명하고 아버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자 알 수 없다며 그냥 돌아가시라고 했다. 그럼 따님에게 대해 당시 사고 얘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가족으로서 그 충격과 상처가 더욱 컸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몇 차례 더 설득을 했지만 얘기를 해 주지 않아 결국 발길을 돌렸다.
김일복 씨는 못 만나더라도 이 마을에 혹시 다른 지뢰피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사단은 마을회관에 찾아갔다. 할머니 몇 분이 계셨다. 이 마을에 지뢰피해자가 있냐고 묻자 바로 옆집에 김용관이라는 할아버지가 지뢰 피해자라고 하신다.
그런데 김용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김일복 씨를 만나 두 사람 모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김일복(65) 씨는 3년 전 7월 18일 김매러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지뢰밭도 아닌데 지뢰가 있더라구요. 아마 비행기로 뿌렸다는 말이 있는데, 콩밭에 갔다가 목이 타 물을 마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지뢰가 터진 거예요. 그날이 초복 날인가 그랬어요.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어떡해. 바짓가랑이를 끌어다가 나뭇가지를 비틀어서 지혈을 했죠. (피가) 뚝뚝 떨어지더라구요. 알몸인데 자갈밭은 어떻게 기어와요. 거기서도 한 2km는 나와야 하는데, 거기서 기어 오다가는 죽겠다 싶어 차라리 풀밭으로 기어가지고 군인 있는 데까지 왔어요. 거기서 소독약만 바르고 성모병원으로 갔죠. 거기서도 바로 수술한 게 아니라 12시간이 지나서 수술을 했죠.”
그런데 김일복 씨 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한 사람도 대부분 아직까지 보상을 못 받았는데 예순을 넘긴 김일복 씨가 어떻게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보상이요? 처음엔 이게 북한군에 다친 것이고 하니까 의료비도 적용이 안되고 내가 전액 다 물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소송을 하려고 하니까 군인들이 전부 허위보고를 했더라구요. 지뢰밭 잘못 들어가서 저렇게 됐다고. 그래서 사단에서 가서 큰소리를 좀 쳤죠. 어떤 놈들 몇이 잘리든 맘대로 하라고 말야. 군대서 허위보고라는게 어딨냐고. 그랬더니 대뜸 쫓아와 가지고 약도까지 다시 그려 가지고 다시 올리더라구. 그리고 나온 게 1천2백60만원인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변호사를 선임해 가지고 재소송했죠. 재소송해서 보상받은 게 2천만원 정도예요. 젊은 사람 같으면 많이 나왔는데 나이가 많으니까 나올 게 뭐 있어요? 농사꾼은 (노동능력이) 65세까지래요. 그러니 내가 지금 65세인데 받아낼게 뭐 있어요. 근데 이래 가지고 무슨 농사를 해요. 나보다 더 노인데(83)이 있으니 죽지도 못하고 죽으려고 했다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는 거죠.”
김용관(81) 할아버지는 90년 6월30일 수해로 논이 망가져 개간하러 논에 들어갔다가 지뢰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제일 어려웠던게 치료비예요. 보상은 없고 치료비만 7,80만원 나왔어요. 의족 값도 안되죠. 그래서 제일 싼 걸로 했어요. 이런 건(김일복 씨 의족을 가리키며) 한 번 하나만 갈아주면 되는데 내건 통째로 다 갈아야 하니까. 이건 2백만원 줬어요. 부르는 게 값이죠. 그런데 한 번 가는데 30만원 줘야해요. 벌써 3개째예요. 자꾸 살이 빠지니까 양말을 여러게 껴야 해요. 불편하기가 말도 못해요.”
말씀 도중 김일복 씨와 김용관 할아버지는 바지를 걷어 의족을 한 다리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의족마저도 빼자 지뢰에 잘려나간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년이란 세월이 흘러 상처는 이미 다 아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먼 곳으로 옮기는 김일복 씨를 보면서 가슴에 남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행 중 한 명이 “어서 빨리 지뢰를 제거해야죠”라고 말하지 김일복 씨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뢰제거요? 되질 않아요. 할래야 할 수도 없고, 다리만 잘라지는 폭풍지뢰는 탐지기에도 잘 안 잡혀요. 대인지뢰는 밟으면 죽죠.
온 산천에 다 그래 놨으니 할 수가 있어요? 이 지방에 안 살면 모르지만요. 운이나 바라는 수밖에...“
운이나 바라는 수밖에 다른 수가 있나
이번조사는 국내에서 처음 진행된 조사였기 때문에 그다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동안 두 마을을 돌면서 지뢰피해자 4명을 만났다. 이중 3명은 국방부에서 준 명단에 없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새로 알게된 지뢰피해자 명단만 21명이다. 이 중 순전히 개인의 과실인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그럼에도 보상을 받을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하다.
민간인을 위주로 조사한 게 이 정도라면 대상을 군인까지 포함시키고 범위를 전국으로 넓힌다면 그 피해자의 수는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피해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지뢰를 건드린 경우와 홍수가 나서 지뢰가 떠내려온 경우다. 앞의 경우는 5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지뢰매설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며 뒤의 경우는 최근까지도 지뢰매설지역이 아닌 곳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다. 지난 8월 장마 때에도 홍수에 지뢰가 떠내려와 인천 세어도 해변가에서 터져 신동권 씨의 엄지발가락이 잘려나간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지뢰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개울가에 놀러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뢰피해자들에게 정부가 할 수 있는 말 역시 현재로서는 운이나 바라라는 말뿐이다.
글/ 노윤미 기자, 사진/ 사진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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