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영화 함께보기] 침묵 너머에는 무슨 소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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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기와 이해하기
해가 뜰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눈이 내릴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나는 한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 보지 못했다. 아니,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내 귀에는 언제나 소리가 넘쳐 흘렀으니까. 오히려 너무 많은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으니까. 해가 뜰 때, 눈이 내릴 때, 어떤 소리가 나는 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역시 꿈에도 해보지 못했다. 소리가 없는 세상,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까. 내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었으니까.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낙타가 개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또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경험해 보지 못한 탓이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인도 캘커타에서 마더 테레사를 도와 잠시 팔자에 없을 것 같았던 ‘자원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독한 열병에 걸려 꼬박 보름을 병원에 누워 있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도 없었고, 검사를 받기 위해 움직일 때도 휠체어에 실려 간호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는 벽을 짚고 걸어야 했다. 그전까지 내게는 단 하루도 병원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낸 경험이 없었다. 그런 내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경험이었다.
악몽 같았던 그 보름의 경험은, 그러나, 내 인생에서 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휠체어에 실려 움직인다는 것,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화장실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돌보고 있었던 마더 테레사의 환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해하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경험해야 한다. 불행히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기에는 사람의 인생이 너무 짧다. 인생이 짧고, 경험이 안정되는 까닭에 세상에는 오해가 충만하고,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이 넘쳐 흐른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길은 ‘직접 경험’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직접 몸으로 겪는 것만큼 완전한 경험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런 ‘간접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성공하기는 어려운 영화?
시와 소설, 미술과 음악, 연극과 영화는 모두 결국은 ‘이야기’다. 나의 삶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큰 소리로 외치는, 또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참혹할 것이다. 오해와 갈등으로만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해 보라. 이야기가 없었다면 인간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일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있기에 그나마 세상에는 이해와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비욘드 사일런스」는 바로 그런 이야기로서의 영화다. 경험하지 못한, 또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로 인해 빚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어떤 식으로 화해와 사랑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청각장애우인 부모와 두 딸, 그리고 그 주변 가족들이 어떻게 서로 닫혀 있는 세계의 빗장을 열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소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우 부모.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소리를 수화로 부모에게 통역해 줄 수 있는 딸. 어린 딸아이는 부모를 은행에 데려가기 위해 학교 수업을 빠져야 한다. 그렇게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던 딸에게 음악이 다가온다. 해가 뜨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보여 주기라도 할 수 있지만, 음악은 보여 줄 수가 없다. 노래라면 가사라도 수화로 보여 줄 수 있지만, 클라리넷 소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수화로 보여 줄 수가 없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세계.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
「비욘드 사일런스」는 그렇게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다. 비욘드 사일런스, 침묵을 넘어서. 침묵의 세계에서만 살아야 하는 아버지는 딸을 이해하기 위해 침묵을 넘어간다. 그리고 딸은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소리를 넘어간다. 침묵을 넘어서 소리를 넘어서. 두 세계가 만난다.
그 두 세계가 만나는 과정을 여기서 일일이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관심이 있다면, 극장으로 가면 되는 일이다. 혹시 이 글을 읽었을 때 이미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 버렸다면, 비디오 가게로 가면 된다. ‘관심’을 가지는것. 극장으로, 비디오 가게로 가는것. 그것은 바로 ‘경험’을 향해 가는 것이다. 비록 간접 경험에 불과할 지라도 어쨌든 경험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서로 단절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비욘드 사일런스」. 독일에서 2백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영화다. 우리 나라에서는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친구인 스페인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장애우들은 어떻게 살 수 있어요?” 외국인들이 살기에 너무 불편한 나라 한국. 장애우들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나라 한국. 영화사 측에는 아주 미안한 얘기지만, 시사회를 보고 나왔을 때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렸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흥행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영화라고. 장애우에 대한 ‘관심’ 자체가 별로 없는 이 나라에서 이 영화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 예상이 틀렸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갔으면 좋겠다. 소리가 없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침묵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서 침묵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침묵을 넘어 사랑으로
해가 뜰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눈이 내릴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 그들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바로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비욘드 사일런스」는 좋은 영화다. 눈부신 특수효과와 눈물나는 러브스토리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 볼만한 영화다. 우리가 까마득히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의 한 구석을 보여 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아름다운 음악이 보너스로 주어지는 좋은 영화다. 그 아름다운 화면과 아름다운 음악을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음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좋은 영화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음을 알려 주기 때문에 좋은 영화다.
침묵을 넘어서. 침묵을 넘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소리? 아니다. 침묵을 넘어갈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관심이고 , 이해이며, 사랑일 것이다. 침묵을 넘어 관심과 이해와 사랑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 타인의 세계를 나의 삶, 나의 세계와 연결할 수 있다. 침묵을 넘어가려면? 우선 몸을 움직여야지. 극장으로 가든, 비디오 가게로 가든........
글/ 조병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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