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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싶어요”

[미국 장애우 운동사 (19)] 시설을 떠난 정신지체인의 독립생활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

본문

동정은 싫다 / 6장: 사람이 먼저다 (People First)
한 정신지체인이 시설을 떠나 결혼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시설 밖의 친인척이나 시설 관계자, 전문가들은 아직까지도 그러한 장애우의 희망에 대해 우려와 부정적인 전망만을 제기할 뿐이다.
미국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을까.
과연 어떠한 고민 끝에 어떠한 해답을 찾았는지 알아본다.



 “그이를 사랑해요”

 자기권리주장은 뜻밖의 곳에서도 터져 나왔다. 사우스베리직업학교의 피플 퍼스트(People First)지부의 회장인 낸시 클리블랜드도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시민권리운동을 주도한 리더였다.

 클리블랜드는 9살 때부터 시설에서 살았다. 거기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기본적인 의사결정도 대신해 주었다. 무엇을 먹고, 언제 이것을 먹으며, 언제 일어나고, 어디서 살며, 어디서 일하고, 어디서 TV를 보며, 언제 잠을 자는 지 등을 클리블랜드가 말하기도 전에 그들이 다 결정해 준 것이다. 심지어 목욕과 같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결정까지도 말이다. 52살이 되어서야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삶에서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겠다는 의사를 주위 사람들에게 밝혔다. 시설에서 알게 된 오랜 남자친구인 리차드 칼슨과 함께 따로 나가 아파트에서 살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며, 법률적인 보호자이기도 한 82세의 이모 마리온 마툰의 것이었다. 진 보웬의 도움으로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모에게 주장하였다. 보웬은 다음과 같이 마툰을 설득했다. 

 “낸시는 감금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금되어 있으며, 그녀가 정작 살기를 원하는 곳에서는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툰은 클리블랜드와 칼슨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마툰의 말에 의하면 조카인 클리블랜드는 운동가들과 법률가들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낙관적이지가 않다”고 은퇴한 특수교사이기도 한 마툰은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클리블랜드를 그룹홈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전의 시도들이 결국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클리블랜드의 진로를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 피플 퍼스트 집회 후에 코네티컷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클리블랜드는 두 가지 모순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시설에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었기 때문에 시설을 떠나 밖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생활기술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면이 있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료들 사이의 두드러진 리더이면서, 신념이 굳은 자기권리주창자가 된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그녀의 최근 상황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나는 9살 때 이곳에 왔다. 나는 리차드와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싶다. 지금도 일어나면 제일 먼저 리차드를 찾는 것이 일과이고 그러면서 그를 느낀다.” 클리블랜드는 리차드가 원하는 아파트의 종류에 대해서 칼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칼슨은 얼굴을 손에 묻었다. 클리블랜드는 이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아요, 나의 사랑.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요”라고 달랬다.

 클리블랜드는 칼슨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보웬은 이 둘이 아주 전형적인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리차드는 매우 로맨틱하고, 생각도 깊으며, 낸시에게 매우 상냥해요. 그리고 낸시는 매우 질투심이 강하죠. 낸시는 리차드의 보호자역활을 자처하면서 다른 어자들이 리차드에게 다가서는 것을 좋아하지 안하요.” 클리블랜드는 또한 매우 낭만적이기도 한데, 클리블랜드는 그녀의 지갑에 칼슨의 사진들 중의 하나를 모서리를 접어서 가지고 다녔다.

  매일 밤, 그녀는 그 중의 하나를 침대 밑에 놓아 두었다.  침대맡에 클리블랜드의 사진 어려 장을 꽂아 놓고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기권리주장은 뜻밖의 곳에서도 터져 나왔다. 사우스베리직업학교의 피플 퍼스트(People First)지부의 회장인 낸시 클리블랜드도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시민권리운동을 주도한 리더였다. 클리블랜드는 9살 때부터 시설에서 살았다. 거기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기본적인 의사결정도 대신해 주었다. 무엇을 먹고, 언제 이것을 먹으며, 언제 일어나고, 어디서 살며, 어디서 일하고, 어디서 TV를 보며, 언제 잠을 자는 지 등을 클리블랜드가 말하기도 전에 그들이 다 결정해 준 것이다. 심지어 목욕과 같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결정까지도 말이다. 52살이 되어서야 클리블랜드는 자신의 삶에서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겠다는 의사를 주위 사람들에게 밝혔다. 시설에서 알게 된 오랜 남자친구인 리차드 칼슨과 함께 따로 나가 아파트에서 살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클리블랜드가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며, 법률적인 보호자이기도 한 82세의 이모 마리온 마툰의 것이었다. 진 보웬의 도움으로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모에게 주장하였다. 보웬은 다음과 같이 마툰을 설득했다.  “낸시는 감금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감금되어 있으며, 그녀가 정작 살기를 원하는 곳에서는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툰은 클리블랜드와 칼슨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마툰의 말에 의하면 조카인 클리블랜드는 운동가들과 법률가들에 의해 ‘세뇌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낙관적이지가 않다”고 은퇴한 특수교사이기도 한 마툰은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클리블랜드를 그룹홈으로 옮기고자 하는 이전의 시도들이 결국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클리블랜드의 진로를 결정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 피플 퍼스트 집회 후에 코네티컷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클리블랜드는 두 가지 모순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시설에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었기 때문에 시설을 떠나 밖에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생활기술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면이 있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동료들 사이의 두드러진 리더이면서, 신념이 굳은 자기권리주창자가 된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그녀의 최근 상황에 대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나는 9살 때 이곳에 왔다. 나는 리차드와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싶다. 지금도 일어나면 제일 먼저 리차드를 찾는 것이 일과이고 그러면서 그를 느낀다.” 클리블랜드는 리차드가 원하는 아파트의 종류에 대해서 칼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칼슨은 얼굴을 손에 묻었다. 클리블랜드는 이것을 보고 “슬퍼하지 말아요, 나의 사랑.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요”라고 달랬다. 클리블랜드는 칼슨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보웬은 이 둘이 아주 전형적인 커플이라고 이야기한다. “리차드는 매우 로맨틱하고, 생각도 깊으며, 낸시에게 매우 상냥해요. 그리고 낸시는 매우 질투심이 강하죠. 낸시는 리차드의 보호자역활을 자처하면서 다른 어자들이 리차드에게 다가서는 것을 좋아하지 안하요.” 클리블랜드는 또한 매우 낭만적이기도 한데, 클리블랜드는 그녀의 지갑에 칼슨의 사진들 중의 하나를 모서리를 접어서 가지고 다녔다.  매일 밤, 그녀는 그 중의 하나를 침대 밑에 놓아 두었다.  침대맡에 클리블랜드의 사진 어려 장을 꽂아 놓고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으로 주문하면 돼요”

  그러나 사우스베리 밖에서도 클리블랜드와 칼슨의 관계가 지금처럼 좋을 것인가? 클리블랜드 조차도 칼슨과의 동거가 위험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툰도 클리블랜드가칼슨을 통제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의심하였다.

  마툰이 특수학급에서 가르쳤던 정신지체학생들 중에 일부는 결혼을 하였다.  몇몇은 아이도 낳아 길렀다. 마툰은 그녀가 살았던 작은도시에서 이전의 학생들과 우연히 만났는데, 일부는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툰은 조카가 그러한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워했다.  물론 클리블랜드 간단한 문장을 읽을 수 있었으며, 편지도 쓸수 있었다. 또 칼슨은 경미한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클리블랜드 보다는 의사소통상의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칼슨과의 결혼이 잘못된다면 클리블랜드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마툰은 걱정하였다. 만약 클리블랜드가 그녀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면, 마툰이 죽고 나면 아무도 그녀를 돌볼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마툰이 이야기하듯이, 그녀의 읽기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음식점에 가서도 메뉴판을 읽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메뉴판에는 그림이 있잖아요. 그래서 어떤것이 좋아 보이면 그것으로 하겠다고 이야기 할수 있어요.”  마툰은 25년 동안 클리블랜드으 보호자였다.  클리블랜드는 부모가 이혼한 후에 사우스베리로 보내졌다. 마툰의 언니인 클리블랜드의 어머니는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신지체인인 딸을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클리블랜드는 30대 후반의 나이였다. 마툰은 이때 클리블랜드의 보호자가 되는 것을 동의했다. 가족 중 아무도 그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리블랜드는 그녀가 시설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모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가 칼슨과 사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서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마리 케이 플래허티가 판사로 있는 사우스베리 법정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의 재판이 전개되었다.  처음부터 플래허티는 클리블랜드가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 당시에 이미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이 혼자 사는 모습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직까지 중요한 이슈에서 선택권을 행사하는 제한적 보호자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래허티는 제한적 보호자에게 주어지는 결정사항의 규칙을 정하였으며, 나머지는 클리블랜드에게 일임하였다. 법적으로 여기서 제한한 이슈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돈과 관련된 문제는 누가 결정을 할 것인가? 만약 투표를 하거나 응급수술을 필요로 할때 누가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러한 선택은 전적으로 클리블랜드에게 달려있다.

  비공식적 심문이 플래허티의 사무실의 옆 회의장에서 열렸다.  서비스 변호사인 캐서린 윌리암의 옆에서 클리블랜드는 그녀의 미래에 대한 논쟁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려 보였다.  11월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은 꽃이 그려져 있는 하얀 니트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진주목걸이와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플래허티는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왼쪽에는 사우스베리에서 온 사회복지사인 다이앤 로이가 플해허티의 오쳥으로 앉아서 그 시설에서 클리블랜드는 경증정신지체 보다 나은 장애상태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윌리암은 클리블랜드가 자신의 보호자가 될 수 있으며, 더 이상 제한적인 보호자가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원생 수를 20년 내에 1/3로

  클리블랜드가 독립하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전문가에 대한 마툰의 불신이었다.  클리블랜드가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는 시설에 보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시도하였다.  그녀는 작은 코네티컷시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곳에 보내졌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고 약속했던 그 가족은 클리블f랜드를 마치 식민지 시대의 계약고용자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지하에 있는 습기찬 구석에서 살았던 그 시기를 클리블랜드는 아주 고통스럽고 외로운 시기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의 두어가지 시도는 클리블랜드를 그룹홈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약 20여명이 있는 커다란 집으로 보내졌으며, 여기서 그녀는 여러 명의 여자들과 한방에서 잠을 청했다.  집보다는 편했지만, 클리블랜드에게는 다른 시설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도와 정지돼 버린 듯한 시간들 속에서 클리블랜드와 이모 마툰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클리블랜드는 지나간 밑바닥 생활을 통해 시설 밖으로 나오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모 마툰에게 클리블랜드가 시설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다만 어떤 시설을 선택하는냐의 문제만 남아 있었다.  마툰은 클리블랜드와 칼슨이 다른 비장애우들처럼 결혼해서 함께 사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카가 다시 그룹홈에서 살게 되기를 바랬다.  즉, 그녀는 클리블랜드가 사우스베리에 다시 돌아간다는 결정을 하기를 원했다.

  반변 주정부의 정신지체인 관할국의 새로운 정책을 가능한 많은 장애우가 지역사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사우스베리와 같은 시설에서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시설생활자 수가 감소하고 있었다. 주의 장기계획은 사우스베리의 인구수를 9백68명에서 20년안에 3백20명으로 낮추는 것이었다.  만약 클리블랜드가 사우스베리를 떠나 직업을 찾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몇 달 안에 다시 사우스베리로 돌아올 지도 모른 일이다.  하울 리라는 사람은 “일단 시설을 나와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냥 있는것 보다는 상처가 크지 않을 것이다”라고 얘기했지만 마툰에게는 이 말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우스베리가 클리블랜드에게 안전한 보호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우스베리는 그녀에게  아주 좋다. 그녀가 그 곳 외에 안전하게 있을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법적으로 클리블랜드는 일단 지역사회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정하게 지도나 감독이 가해지는 그룹홈이나 아파트에 갈수 있었다.  이곳에는 사회복지사나 서비스 제공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클리블랜드를 돌본다.  24시간, 혹은 적어도 하루에 몇시간은 누군가가 클리블랜드와 함께 살 것이다.

  그리고 일자리가 제공되어질 것이다.  결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클리블랜드였다.  클리블랜드와 칼슨이 함께 다른 그룹홈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느냐, 혹은 가가운 곳에서 따로 사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을 결국 클리블랜드였다.  이것이 그들의 사생활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함께 할 수도 있는 방법이다.

  마침내 플래허티는 클리블랜드가 제한전인 보호자를 가지는 것에 동의하였다.  클리블랜드는 덴버리에서 칼슨과 함께 사는 것을 결국 포기했디.  그곳이 마툰이나 칼슨의 어머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칼슨은 가족들과 함께 덴버리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왔다.  이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녀는 카페테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새 직장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고 리차드를 매일 전화로 불러 만났고, 이모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클리블랜드와 칼슨 사이에 있었던 불운한 관계를 끝냈다.  클리블랜드는 그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살게 된 것이다.


 TV가 가져온 조용한 혁명

  텔레비전은 자기권리주창자들을 훈련시켜 왔다.  그룹홈이나 시설에서 TV를 보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제 TV를 보고 들으면서 어릴 때 결코 보지 못했던 시화 정부의 사업에 대해서 소개받는다.  그러면서 지역내 정치 사안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는데 TV에서 이러한 것들을 배웠기 때문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다.  왜 이러한 움직임이 오늘날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당신은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다이브웨이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1988년 오래곤주 살럼 시의회에서 일하고 있는 데이비드 빔도 주립시설에 살던 10년 동안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TV를 보았기 때문에 읽고 쓰기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토로했다.

  자기권리주창자 중의 한 사람인 탐 홉킨스도 계속해서 TV를 보았다.  세크리멘토의 피플 퍼스트 의회의 지도자인 홉킨스는 며칠 전에 보았던 PBS 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왜 고등학교에서 히스패닉과 흑인들의 중퇴율이 높은 지에 대해 분석해 나갔다,

  “인터뷰에서 한 교육전문가는 교사들이 히스패닉과 흑인 학생들에 대해서는 매우 낮은 기대치를 갖고 있다고 답하였다.”고 홉킨스는 설명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사들도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나는 그 방식이 정신지체장애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나에게 유용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홉킨스는 읽기와 쓰기의 최소한의 기술만을 지닌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보호작업장에 갔는데, 그곳에서 목공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대신에 직업적인 과업을 위해서 일정비율의 금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보수를 받는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지 못했다.  “나는 한 시간에 40달러를 받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40센트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그는 나사의 수를 세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앉아 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나는 세계에서 아마 가장 카드놀이를 잘하는 사람일거다.  나는 하찮은 것조차도 배우지 못했다.  여기는 단지 어른을 위한 주간보호센터이다. 이것이 이 시설의 모든 것이다.”

  그는 처음에 제안받았던 것처럼 목공기술은 전혀 배우지 못했고, 4년 반이 지난 후에 결국 그만두었다.  “나는 피플 퍼스트에 참여한 후에 그렇게 속았던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전까지 나는 착취당했으며, 노예처럼 부려졌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보호작업장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왜 우리가 격리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산간벽지에 있어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시내 중심에서 일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비장애우와 친하게 사귀는 것을 왜 용납되지 않는가?”홉킨스는 이렇게 분개했다.

  1985년에 홉킨스와 그의 다른 동료인 산드라 젠센은 당시 부통령인 부시를 만났다.  30분 동안 면담하면서, 홉킨스는 보호작업장에서 실망한 것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하였다.  다운증을 가지고 있는 젠센은 그녀가 IQ가 30밖에 안되기 때문에 부모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시설을 떠나서는 절대 혼자 살 수가 없다는 얘기를 수차례에 걸쳐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혼자서 살고 있다.

  몇 년 후, 부시는 T.J.먼로가 쓴 편지를 통해 자기권리주장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의 편지를 상의의 주머니에 넣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먼로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대통령께,
  저는 자기권리주장에 대해서 적고자 합니다.  제 이름은 T.J.먼로이고, 코네티컷에 있는 피플 퍼스트의 회장입니다.  과연 무엇이 자기권리주장입니까? 자기권리주장은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권리주장은 자신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더 독립적이며, 자신의 두 다리로 서고 자기권리주장으로서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장애를 알고 우리가 우리의 이슈로 인해 함께 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이하 생략)

  1993년 먼로는 코네티컷을 떠나 녹스빌로 이사가서 테네시의 피플 퍼스트를 위한 자기권리주장 지부를 조직하는 일을 하면서 독립생활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재 직업적인 전문지역사회 조직가이지, 더 이상 자원활동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확고한 그의 생각이었다.(계속)

 글/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재학하고 있다)
        

조셉 피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책을 썼다.)

 

마음을 털어놓은 제니(Jenny Speaks Out)


 영국 런던의 성 조지 성신보건 도서에서 1992년에 츨간한 작은 그림책이다. 경증 정신지체인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도록 짧고 간결한 문장 한 쪽에 선명한 그림이 한쪽씩 배열되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나와 존과 메리는 친구였다. 그들은 새로운 집으로 함께 이주하였다. 케이는 그들이 새 집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존은 자신의 기구와 카페트와 커튼을 선택하였고, 아끼는 장식품들은 창가에 배치하였다. 메리도 그녀의 가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려서부터 가지고 놀던 곰 인형을 침대에 눕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옷을 서랍장에 넣었다. 그러나 제나는 그녀이 방을 꾸미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밖에 앉아 잇곤 해서 방은 늘 텅 비어 있었다. 케이가 제나에게 “네 집을 정리하도록 도와줄까?”라고 묻자 제나는 방구석으로 달려가서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흔들며 울어댔다. “무슨 일이 있니?”케이가 물었지만 제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케이가 제니의 가방 안에 잇는 사진 한 장을 집어들고 “너의 엄마 아빠니?”라고 물었다. 제니는 사진을 확 뺏으면서 “나는 그 사진을 증오해요!”라고 소리쳤다.

제니는 그녀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그녀의 머리를 벽에 꽝꽝 부딪쳤다. 메리와 케이는 걱정스러웠다.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겠지?”케이가 물었다. “아빠는 ‘이것은 비밀이야’라고 했어요”라고 제니는 말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불쾌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제니는 케이의 옷자락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나쁜 비밀을 지킬 필요는 없단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

 케이와 메리가 말했다. “아빠가요, 매일 밤마다 내 침대에 와서 나를 아프게 했어요. 그리고 내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어요”라고 말하면서 제니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가르쳤다. “아빠는 여기를 아프게 해요. 더러워요”라고 말했다. 제니는 케이가 가방에서 꺼냈던 사진을 물어 뜯으면서 “나는 그를 미워해요. 그가 죽었으면 좋겟어요”라고 했다. “맙소사! 불쌍한 제니, 네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케이는 제니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존이 방문을 노크했다. “존이 들어와도 좋니? 네 방에 누가 들어와도 되는지는 너에게 달린 거야” “존, 들어와. 노크해주어서 고맙다.” 제니가 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제니는 또 다시 울기 시작했고, 케이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존에게 해주라고 했다. 그들은 마루에 둘러앉았고, 메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존은 그와 같은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제니는 이와 같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제니는 그녀의 물건들을 방에 들여놓고 방 정리를 하였다. 케이는 앞으로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이 짧은 내용을 소개하는 이유는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 서서히 여성 장애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데, 정신지체여성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방어능력이 적은 정신지체여성이 성폭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는 교재도 발간하여야 할 것이다.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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