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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면

홍윤기의 철학 단상(5) - 로고스의 음향

본문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역사 기록을 보면 서양에서 처음으로 철학을 시작했다는 철학자들에 대한 얘기가 적지 않게 나온다. 우리는 주로 역사 기록을 통해 옛날 일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옛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철학자들을 크게 존경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신을 믿는 것보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려웠던 시절 그리스 철학자들이 용감하게 신을 부정하고 나섰을 때 사방에서 이런 불경스러운 철학자들을 떠받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현재 대학의 철학교수들이 별로 하는 일 없이도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는 것에 비하면 불행하게도 이 최초의 철학자들은 그야말로 사방에서 ‘왕따’를 당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탈레스가 살았던 밀레토스에서 가까운 에페소스 시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대단히 고고한 심성의 소유자였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떼거지로 봉기를 일으켜 성 밖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 있던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에 숨어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달의 여신에 대한 찬가를 지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철학하는 자신을 가리켜 세계 최초로 ‘철학자’라는 명칭을 썼다는 이 사나이의 입에서는 하는 소리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는 잘난 소리만 나와 사람들은 그에게 ‘어두운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로고스가 엄연히 존재하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전에, 그리고 처음 듣고 나서도, 변함없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들이 이 이법에 따라 생겨나고, 내가 그 본성을 하나하나 분별하여 어떻게 그것이 만들어졌는지 설명하여 그 말함(이치)과 행위들(과정)을 분명히 밝혀 그네들에게 접하게 했건만 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도무지 겪은 적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다. 이런 것도 겪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은 자고 있을 때 자기들이 한 일을 까맣게 잊듯이, 잠에서 깨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한 말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밤에 잘 때나 낮에 잠자지 않을 때나 별 차이없이 멍청하게 졸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욱 화나는 것은 자기 말을 들은 사람들도 그 말을 듣기 전과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은 그 잘난 말을 한 헤라클레이토스 자신밖에 없는 셈이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그런 철학자들을 따돌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난리가 난단 말인가? 위에서 인용한 헤라클레이토스의 그 잘난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문제는 ‘로고스’(logos)이다. 마치 영화관이나 아니면 점잖은 레스토랑 간판 같은 이 단어에, 사실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 이후 근2천년 동안 지속되었던 서양 철학 전체의 비밀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 단어의 뜻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100명의 철학자가 로고스라는 말을 쓰면 그 뜻은 101가지가 나올 정도이다.

우선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말한다”는 것을 뜻하는 ‘레게인’(legein)에서 유래하였다. 당연히 ‘말’이란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알아들을 만한 이치’가 들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말’이란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말이 안되는 말은 말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로고스란 우선 ‘말이 되는 말’, 또는 ‘이치에 맞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사람치고 누가 말이 안되는 말을 하겠는가? 철학자들이 별종으로 아니 E.T.로 보인 이유는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도, 도리어 딴 사람들이 자기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탓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듣기에 이것이야말로 말도 안되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진짜 누구 말이 말도 안되는지 따지자고 들면 대단히 골치 아파진다. 왜냐하면 말이 단지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와 귀에 들리는 소리만은 아니라고 할 때 말에는 반드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통하게 되는 ‘이치’(理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라는 단어 역시 그 어떤 ‘이유’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주장의 ‘근거’, 나아가 말하는 이들끼리 통하는 ‘심정적인 의도’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많은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치라는 것은 인간들의 감각이나 감정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는 약간 다른 차원에서 나온다. 감각이나 감정이야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멋대로, 또는 자기 나름대로 느끼거나 부리면 그만이지만 이치는 적어도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이 듣거나 겪더라도 통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치가 가진 바로 이런 성격이 철학자들에게 느낌이나 감각보다 이치를 받아들이거나 제시하는 기능을 보다 고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해놓은 말을 놓고 이치를 따지고자 하면 단지 자기가 느끼거나 겪은 것만 갖고 말이 된다고 우기기는 지극히 곤란해진다.

이런 견지에서 자기 말이 그야말로 말이 된다고 하려면 어느 면에서 당장 그 말을 듣지 않고 있는 사람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기 바쁜 사람들이 눈 앞에 없는 사람들까지 일일이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할 일 없는 철학자들은 눈 앞에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물까지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아주 처치곤란한 존재이다. 그리고 더욱 난처한 것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이나 현재 내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이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물이나 인간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나은 경우가, 그것도 아주 빈번하게, 생긴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행복의 경우를 놓고 다음과 같은 독설로 사람들이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음을 비꼬고 있다. “육체적인 쾌락에 행복이 있다면, 우리는 먹을 여물을 찾아낸 황소야말로 행복한 존재라고 부를 것이다. ··· 당나귀는 금보다 짚을 더 좋아한다. ···돼지는 깨끗한 물보다 진흙탕을 더 좋아한다.”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지만 그 행복을 찾다가 황소나 당나귀, 또는 돼지가 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들의 소망에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의 시선을 점차 우리가 사는 이 진흙탕같은 세상에서 끌어올리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보다 더 넓은 광막한 우주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려고 시도한다. 결국 철학자들이 자기들의 말로써 전달하려는 이치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경험하는 삼라만상 전부를 포괄하는 바로 이 ‘우주의 이법’에 근거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간파한 로고스의 가장 고차적인 의미는 다름 아닌 ‘우주의 이법’이다.

그런데 아무리 개돼지 취급을 받더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못 알아듣는 것이다. 분명히 “누구나 생각하는 능력은 공통으로 갖고 있다”고 헤라클레이토스 선생이 고맙게 한마디 해 주었고, “사람이라면 그 모든 것에 공통된 이 우주의 이법을 따라야 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었지만, “이 우주의 이법이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자기들에게만 통하는 그런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통하는 로고스가 철학자에게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비극이었다. 그 로고스는 일상의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너무나 추상적이었고, 신을 섬기는 것이 전문이었던 신전의 사제들에게는 너무나 불경스러웠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있어서 “이 질서잡힌 우주(cosmos)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존재하지만, 수많은 신들 가운데 어떤 한 신이나 인간종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영원히 그 정해진 척도에 따라 불이 당겨지고, 척도에 따라 그 불꽃이 지펴지는 영생(永生)의 불”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고스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신들이 들어가 멋대로 장난칠 여지란 전혀 없었다. 바로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정당함에 대한 철저한 확신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지극히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우주의 진리가 오직 자기들에게만 알려지고, 일단 그런 진리를 안 이상 더 이상 세속의 구차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고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철학자들 가운데는 철학하는 삶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꾸민 이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잘 알려진 사모스 섬 출신의 피타고라스는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사물과 우주는 수적인 조화에 따라 운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때 우주는 “혼탁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음향을 발산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일은 우주와 사물들의 조화를 관조할 수 있게끔 속세와 일체의 인연을 끊고 자신의 영혼을 깨끗이 유지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이 우주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여기에서 “속세와 일체의 인연을 끊는다”고 했을 때 거기에는 인간의 영혼을 육체와 분리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강력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신념 아래 피타고라스는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당시 고도로 발달한 그리스 문명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이태리의 사모스 섬으로 들어가 이른바 “피타고라스 교단”이라고 불리는 은둔자의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고대 세계에 수많은 전설을 남긴 이 교단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법정살인을 당한 뒤 세상에 환멸을 느낀 청년 플라톤이 이 지방을 찾아올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이 교단에서 플라톤은 서양 철학사에 근 2천년간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과 ‘영혼의 죽지않음에 대한 이론’을 체득하였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인간에게 육신의 삶이 지속되는 한 영혼이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방도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단 하나 자신의 육신이 발휘하는 온갖 능력을 철저하게 억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육신이 과연 정상적인 육신일 수 있겠는가? 감히 말하건대, 로고스를 추구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머리 속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지금 보자면 엄밀한 의미에서 ‘장애우’가 아니었을까?

고대 그리스 조각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지만 당시 세속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되고자 했던 가장 바람직한 인간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들이나 밀로 섬에서 출토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룬 근육과 운동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 이들의 몸매가 조각되고 숭배받고 있던 시절에 우주의 이법 즉 로고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들은 근본적으로 장애우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고방식이 실질적으로는 역사라는 보다 긴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면 필자가 너무 『함께걸음』의 편집 취지에 비위를 맞추는 것일까?


글/ 홍윤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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