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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대한 장애인, 혹은 감독의 세가지 태도

본문

#1.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영화이야기지만 영화감상문은 아니다. 최근 접했던 세 편의 영화, <어느 네 팔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 <프릭스>, <느린 남자>를 보며 떠올랐던 단상들을 정리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내적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세 편의 영화들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위치는 서로 다르다. 객관적인 위치라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선택한 자리가 다르다. 그 자리는 감독이 보는 현실일 것이다. 이 현실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관객이 보고 느끼는 현실이 따로 있을 것이며 글을 쓰는 필자가 보는 현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보는 현실 등 수많은 현실과 진실이 교차할 것이다. 이 글은 그 중 한 가지 입장일 뿐이다. 주관적으로, 극히 주관적으로 필자가 보고 느낀 영화 속 현실을 나열해보겠다. 독자 여러분들이 분별할 현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실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2.어느 네 팔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 (Never Ending Story)
감독: 김은주/11분 30초/2004년
줄거리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소녀는 평생 외출 한 번 없이 일만 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은 일감과 식량을 가져다주는 청년. 네 개의 팔을 이용해 편안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언젠가부터 청년과 청년이 속한 세계를 마음에 품는다. 그들과 같아지고 싶어서 두 팔을 자른 소녀. 그러나 청년과 청년이 속한 세계의 타인들은 그녀를 외면한다.

<오아시스>의 공주가 경쾌하게 춤을 출 때, <효자동 이발사>의 낙안이가 아버지 성한모의 정성에 힘입어 걸을 때, 나는 깊이 공감했다. <나는 행복하다>를 찍으며 만났던 뇌성마비장애여성 현진씨는 자신의 소원이 “똑바로 걷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필자가 겪은 경험이 근거가 되어 필자는 공주의 판타지에 공감했고, 성한모의 지극정성에 감동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걸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언젠가 걷게 되는 날만을 꿈꾸며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면서 “비장애인의 시각으로 장애인의 생각을 헛짚고 있다”고 비판한 소장섭기자의 글을 보며 깨달았다. 필자는 장애인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본 편의성의 오류, 제한적 경험을 전부로 여긴 전체화의 오류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소망은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첫 번째 소개하는 이 영화는 그런 현실을 반영한다. 실험영화를 세세하게 따지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오히려 실험영화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풍부하게 읽힐 수 있다. 팔이 네 개인 소녀는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이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봤을 때 네 개의 팔은 오히려 우월한 신체조건에 해당한다. 그러나 소녀는 장애를 안고 살더라도 다수의 무리에 끼고 싶어서 네 팔 중 두 팔을 잘라내버린다. 차이 때문에 소외당하는 현실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은 다르면서도 닮아있다. 1998년 WOH(세계보건기구)의 국제 장애 정의 개정안인 국제장애분류(ICIDH-2)에 따르면 ‘손상’, ‘활동’. ‘참여’. ‘환경’이라는 네 가지 차원이 장애를 규정하는 데 작용한다고 명시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장애의 규정이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손상된 것을 회복시켜 장애인의 사회적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재활의 관점에 머물러있다. 그리하여 현실에서의 장애는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스스로를 낮춘 장애인들이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영화 속 네 팔 소녀가 우월한 몸을 포기하는 태도는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애미담의 주인공들의 태도와 결국 동일하다. 다수의 질서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간혹 한 두사람은 그렇게 주류질서로 옮겨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영화에서 나타나는 장애인의 태도는 정체성을 부정한 채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열망하는 태도이다. 

 #2.프릭스(Freaks)
감독: 토드 브라우닝/64분/1932년
줄거리

서커스를 배경으로, 공중 그네를 타는 미녀 곡예사 클레오파트라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왜소증 장애인 한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스를 비롯해 막간극을 하는 장애인들을 바보 취급하던 클레오파트라는 한스가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결혼을 승낙한다. 그녀는 괴력을 가진 애인 헤라클레스와 공모하여 한스에게 조금씩 독을 먹이는 수법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그 음모를 눈치 챈 한스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폭풍우가 치는 밤 두 사람에게 반격을 가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세간의 혹독한 악평을 받았고 상영을 중지하는 영화관이 속출하면서 흥행에 실패했다. 샴 쌍둥이, 왜소증 장애인, 상반신만 있는 남자, 두 팔이 없는 여자, 양성인간 등이 실제로 출연했고 영화 속에서 비장애인들은 그들의 손에 난도질당한다. 비장애인 관객들은 구역질을 하며 극장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그 후 30년 동안 영화는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토드 브라우닝 감독은 소년 시절, 당시 유행에 따라 가출을 해서 서커스단 생활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이 담긴 이 영화에서 토드 브라우닝감독은 장애인의 편에 선다.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는 금발에 멋진 미모, 괴력과 멋진 육체를 가졌지만 누구보다도 악마적이고 비열하다. 반면 장애인들은 약한 자를 돌보고 불의를 응징한다. 실제 당대를 풍미했던 서커스 스타들을 대거 출연시킨 이 영화 어디에서고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나 호기심은 발견할 수 없다. 손이 없어 발로 식사하거나 다리가 없어 손으로 걷고 사지가 없어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모습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낯선 존재들에 대한 호감과 믿음이 생겨난다.
영화 속 장애인들의 존재는 그동안 봐왔던 어느 영화들과도 다르다. 심각한 기형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부모와 가족의 사랑은커녕 인간적인 대접이라고는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엘리펀트맨>과도 다르고 과학자 아버지의 실험에 의해 태어난 <프랑켄슈타인>과도 다르다. <엘리펀트맨>에서 장애인은 서커스쇼의 볼거리가 되어 비장애인들에게 스스로를 ‘정상인’이라 여기며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프랑켄슈타인>의 장애인은 ‘정상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드러냄으로써 동정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장애인들은 즐겁고 당당하며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자신들의 세계에 동참하라고 촉구한다.
왜소증 장애인 한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피로연장면에서 이 입장은 명확히 드러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동료 장애인들이 “We accept her. One of us(우리는 그녀를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커다란 술잔을 돌릴 때 잔을 받아든 클레오파트라는 “이 더럽고 불쾌한 병신들”이라고 욕하며 자리를 뜬다. 그 장면이 던지는 심리적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즐거운 축제의 자리에서 장애인들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민 손은 당당하다. 그들은 클레오파트라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권리,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것을 축복해주는 환영회 자리를 더럽고 불쾌하게 깨뜨리는 존재는 클레오파트라와 헤라클레스이다. 여태껏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었던 수많은 가치들은 그렇게 가볍게 깨져버린다. 금발, 아름다운 얼굴, 관능적인 몸매와 같은 겉보기 아름다움은 장애인 공동체의 건강한 기운을 당해내지 못한다.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진실된 장애인들의 자신감은 우리를 낯선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의 결말, 장애인공동체의 성원들은 손과 발, 입을 이용해 흉기로 클레오파트라를 새롭게 조각한다. 악마적 심성의 노예가 되었던 아름다운 육체를 훼손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방식으로 클레오파트라를 해방시켜준다. 두 번째 영화에서 드러나는 장애인의 태도는 우월감이다. 영화는 그동안 ‘정상’이라는 이름에 눌려있던 낯선 매혹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준다. 그 충격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2.느린 남자(Late Bloomer)
감독: 시바타 고/83분/2004년
줄거리

어느 날 여학생 자원봉사자 노부코가 논문 자료를 얻기 위해 장애인 스미다를 찾아온다. 스미다는 노부코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돌봐주는 다른 도우미 타케의 밴드 공연에 노부코를 데려간다. 하지만 노부코는 오히려 타케와 가까워지고, 스미다는 감정의 격류에 휩싸이고 만다.

 

이 영화는 놀랍다. 팸플릿에 인쇄된 줄거리는 사전 정보로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중증장애인이 도우미에게 갖는 애틋하고 애처러운 감정선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는 깜짝 살인들과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줄기 사이에서 자취를 잃고 헤맨다. 리얼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만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판타스틱했다. 이런 영화들은 줄거리보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그 순간의 느낌에 집중할 때 그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움직일 때마다 사지가 뒤틀리고 뭐든지 지저분하게 흘리면서 먹는 스미다씨. 그는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힌다. 음성 전달기를 두드려서 의사표현을 하기 때문에 항상 느릴 수밖에 없는 그는 겉으로는 느리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그건 인상일 뿐이다. 느리고 평화로워 보이기 때문에 안분지족의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관객들의 일차적인 편견이다. 스미다씨는 83분의 런닝타임 동안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종횡무진하며 관객들의 편견을 흔든다. 영화 속 스미다씨를 연기한 실제 스미다씨의 바램은 감동적이거나 눈물 짜내는 휴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스미다씨와 시비타 고 감독은 <의리없는 전쟁>,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수많은 AV(adult video=성인용 에로 비디오)를 보면서 같이 내용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느린 남자>는 질투심에 못이겨 자신의 도우미를 살해하고 그것을 계기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산책길에 마주치는 운동선수, 외로운 밤길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진작가, 술에 취한 회사원….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난도질당하고 스미다씨 또한 침묵 속에서 칼을 휘두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자기검열.
“왜 하필 저 연쇄살인범을 중증장애인으로 설정한 걸까?”
곧바로 받아치는 또다른 내면의 목소리, ‘그럼 연쇄살인범은 꼭 비장애인이어야 한다는 거야?’
고정관념과 선입견들의 무더기를 헤치고 시바타 감독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살인이라는 설정을 이용한 것인가?”
그러나 시바타 고 감독의 의도는 그 문제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었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아무 이유 없는 살인이 많아져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누군가가 특정인을 살인할 때 어떤 이유가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 왔지만 이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동안 소외된 인간이 자기표출이라는 형태로 별 이유 없이 살인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 영화가 도발적이면서도 새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애인이 살인을 한다’라는 설정에 주목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미세한 차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을 이루는 수많은 구성요소 중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태도는 ‘장애인은 착하고 약하고 보호받아야하는 존재’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동시에 적용하는 것과 같다. 이 영화는 바로 여기서 빛난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대상과의 신뢰가 형성되고 그 사람을 진정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장애는 그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이며 결코 그를 절대적으로 규졍하는 요인이 아니다. 
“결국 스미다 씨와 나와의 우정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찍은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는 시바타 고 감독의 고백은, 관계의 깊이가 영화를 풍부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오래된 친구와 같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 오랜 친구 아무개는 첫 만남에서 빨간 치마를 입고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서로의 소울 메이트가 되었을 때 그녀의 휠체어는 그녀가 즐겨입는 빨간 치마처럼 그녀를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서로 닮아가며 그렇게 살아간다. 세 번째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애인의 태도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만 평등한 모든 인간이 서로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평등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우리들은 이렇게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 편의 영화가 보여주는 태도들에 가치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장애에 대한 태도, 장애인의 위치, 장애인-비장애인의 파트너쉽 등이 다양하고 다양하고 또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서있는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다양한 현실을 편견없이 반영할수록 다양성은 좀더 빨리 획득되어질 것이다. 높낮이 없이 평등하면서도 모든 색깔이 인정되는 새로운 세상을 바란다.


글 류미례 /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운영자(http:/go.jinbo.net/inmylife)

작성자류미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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