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왜 우리가 없어지고 있는가. > 문화


[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왜 우리가 없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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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갈수록 한 가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민족 공동체 운운하던 대한민국 구성원들한테서 언제부턴가 "우리"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 "나" 아니면 무조건 "남"이고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설정이 이 땅의 전체 문화를 지배한다는 사실 - 그런 생각이 우려를 넘어서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고 아주 거대하게 왜곡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 양분법은 모두의 정신세계에 휴전선 같은 뚜렷한 단절을 공식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렵고 힘들 때는 같이 살아나자고 투쟁하며 싸웠던 이들끼리도 이젠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무조건 적이라고 타인들을 규정짓는다. 정치판을 보면 확실해진다. 어제의 갈등도, 오늘의 동지도 없다. 표를 찍어 준 유권자들은 아예 염두에도 없다. 개혁이니, 보수이니 하는 말장난으로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을 뿐이다. 모두가 집권자인 양, 저마다 최고인 양 막말을 쏟아 뱉는다.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시대의 배반자로 낙인찍힌단다. 누가 그들에게 그만큼의 위대한 판단력을 부여했는가. 그렇다고 그들이 옳은 건가? 절대 아니다. 패거리정치에 지친 민심들은 그들에 대한 환멸감 속에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고, 더러운 세상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눈 감으려 할 뿐이다.
  노동 운동도 마찬가지다. 내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국민의 대다수인 다른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무조건 파업이고 타협도 없는 총력 투쟁이다. 파업과 투쟁을 피하려면 자기 말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철도가 멈추고 물류대란이 일어나고 국가기간시설이 마비되든 망가지든 상관 않겠다는 식이다. 자기 앞에 항복하지 않으면 남이야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협상의 기본은 대화와 양보와 합의점의 도출이다. 그런데 자기 얘기가 백 퍼센트 옳으니 무조건 다 받아들이라는 자세뿐이면, 상대방한테 백기를 꽂고 무릎 꿇으라는 것 말고 무엇이 남는가. 다른 분야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 때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정작 자기가 파업에 돌입할 때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불가피성만 늘어놓는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전부 적이기 때문이다.
  언론매체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부여한 적이 없는데, 자기 자신을 국가와 민족의 대표성이라고 스스로 부르짖는다. 자신들의 논조가 신앙과도 같이 옳고 진리이며, 여기에 따르지 않는 세력들은 전부 암적인 존재로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식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보수 세력은 전멸해야 하며, 보수라는 이름 앞에서 개혁세력은 모두 빨갱이 아니면 불순분자들이 된다. 신문의 부수 확장을 위해 서로에게 칼부림까지 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친 골프는 건강을 위한 레저이며, 남들이 친 골프는 접대와 향응제공이란다. 자기가 쓴 글은 정론(正論)이고, 남이 쓴 글은 허세와 아집이란다. 하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보며 비웃는 걸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함께 뛰어가다가 누군가가 넘어지면, 잠시 멈춰 서서 일으켜 세우고 흙먼지를 털어 주며 격려해 주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자기가 받은 돈은 깨끗한 정치자금인데, 남이 받은 돈은 불법모금이며 범죄행위란다. 자기의 투쟁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대의적 선택이며, 남의 투쟁은 먹고 살만한 놈들이 배불러서 날뛰는 미친 짓이란다.
  고수익을 올린다는 걸 어린애들도 알만한 직종의 사람들이 일반 서민보다 적은 세금을 낸다. 자기들도 어렵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건 계산이 잘못된 궤변이다. 1억을 가진 사람한테 천만 원은 작을지 모르지만, 그 작은 돈조차 없는 사람들한테 천만 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는 절대적이며 생존의 모든 것이다. 경제적 절망 때문에 대안도 없는 자살의 행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가정과 가족이 붕괴되고 카드 빚 때문에 목숨을 끊는 일은 이젠 아예 일상화됐다.
 그런데도 엄살은 끊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총수라는 이유 하나로, 이제 과장급 정도밖에 안 될 나이의 젊은 아들은 황태자가 되어 수백억, 수천억을 소유하고 있다. 초등학생 연령인 재벌 집안 어린이들의 재산은 수십억 원이란다. 법을 피해 물려 주고 떼어 주는 편법증여가 일상화된 상황이다. 그런데도 회사직원들한테는 허리띠를 졸라매란다. 긴축정책을 해야 하고, 모든 것에서 비용을 줄여가란다. 모든 게 어렵고 힘든 상태이기 때문이란다.
  중소형 전셋집을 살면서도 수천만 원짜리 수입차를 몰고 다니는 이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차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면, 그 사람의 개인적 취향을 가지고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사진을 좋아한다면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은 욕심은 당연한 것이며, 인라인스케이트나 패러글라이딩 같은 취미가 있다면 더 좋은 장비를 소유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편법을 동원하거나 남을 밟고 일어서서 자기 것만 챙기려는 사고방식에 있다. 정당한 재산증식이 아니라, 남들의 소중한 재산을 조금씩 긁어모아 자기 주머니에 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심각한 문제이다. 정부 부처에 근무하는 지인한테 들은 얘기인데, 어느 사람이 은행에 집 담보 대출을 받으러 와서 서류 심사를 했는데, 2년 동안 40여 차례의 주소 이동과 주택매매가 있었단다. 부동산 시세를 어떻게 연구하고 노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가 1억 2천만 원이던 25평 아파트에서 2년만에 7억짜리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부동산 관계자의 말을 들어 보니, 정말 귀신같이 머리를 쓰며 움직이면 그 정도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부동산 가격을 날뛰게 만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몇억 짜리 수입차, 공적자금 몇십억 횡령, 몇백억 정치자금 제공, 몇십억의 세금포탈 등의 얘기를 읽고 듣노라면, 일당 몇만 원짜리 월급쟁이들은 술 생각만 떠올린다. 같은 사회 안에서도 정말 다른 나라 얘기 같은 소식밖에 없고, 그런 극소수의 존재들이 모이고 뭉쳐 이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다는 생각을 하면 허탈과 분노가 동시에 솟구친다. 그래서 쓸쓸한 민중들은 기댈 데 없는 현실 속에 인생대역전을 꿈꾸며 복권 따위에 기웃거리는 게 아닐까? 평생을 살아도 천만 원의 현찰을 지폐로 직접 만져 볼 일조차 없는 이들에게 사과박스에 담긴 비자금 몇 박스가 누구한테 전달됐느니 뭐니 하는 얘기가 끊이지 않으니, 법과 양심대로 산다는 게 전부 부질없는 짓이라는 자괴감만 들 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없기 때문이다.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적, 도덕적 의무를 망각한 까닭이다. 아니, 망각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권한으로 전체를 위한 조율을 맡아야 하는데, 높은 자리에 있는 동안 서둘러 모든 걸 자기 것으로 챙기려는 편협한 이기심 때문에 세상을 일그러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요구가 통합되면 불리한 여론이 조성될지 모르기에, 끊임없는 갈등 요소를 재창출하며 지역간, 세대간, 빈부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자기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 조바심을 낸다.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 지금 현재의 모습일 뿐인데, 모든 걸 현재의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린다. 군부독재 시절에 쥐죽은 듯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들까지도 투사인 양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밥그릇을 놓지 않겠다고 난리를 친다. 쉬운 말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 된 것 같은 씁쓸함은 너와 나의 사이에 끊임없이 균열을 만들어간다. 민족공동체니 뭐니 하던 국민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없고 이젠 "내 편"과 "적대적인 상대"만 남겨진 것이다.
  글쎄, 그런 세상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으면 바보일까? 나도 내 것을 챙기려 혈안이 되어야 할까? 돈이 이기고 권력이 이기고 편법이 우월하다면, 이제부터 기존의 모든 걸 포기하고 그런 대세에 편승해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달음질쳐야 할까?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지 말자고 무시하며 지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런 문제로 자꾸만 골치가 썩는 걸 보니, 이제야 내가 제정신을 차린 건지 아니면 시류에 물들어가는 건지가 구분되지 않는다.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는 게 속편한 일일까? 아니면 간직했던 나만의 세상이 소중한 것일까……. 정말 모르겠다는 말밖에 할 얘기 없는 나날이 내 생활에서 허망하게 흘러가고 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채지민 (시인·소설가)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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