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업고 장애 혐오로 튀어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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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공식 포스터(출처_tvn)
여기 시간여행자가 있다.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갖게 된 현재와, 타임슬립으로 사고의 순간을 모면한 또 다른 현재를 산다. 사고를 당한 시간 속에서는 병실 침대에 누워 “왜 살렸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려서 날 이렇게(장애를 갖게) 만들어. 왜~”라며 생명을 구해준 이를 원망하면서 상실과 불행의 늪에 빠져 산다. 한편, 사고를 모면한 시간 속에서는 감각이 돌아온 두 다리를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지만 시간 이동을 할 때마다 다리에 감각이 있는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며 노심초사한다.
그는 왜 이렇게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상실과 불행으로 받아들일까? 또 장애가 사라진 지금만을 갈망하며 다시 장애를 가진 몸이 될까 봐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는 걸까? 이 모습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장애에 대한 잘못되고 일그러진 인식, 장애를 미학적, 기능적 결함으로만 보는, 그래서 혐오하며, 불행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규정하고 말하는 무례가 읽힌다.
벌써 짐작하시겠지만, 이 시간여행자가 실은 종영한 지 두 달이 된 지금까지도 ‘선재 앓이’ 중인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여주인공 ‘임솔’이다. 원작에도 없는 임솔의 장애 설정, 타임슬립 장르에서 주인공이 ‘장애’와 ‘비장애’를 넘나드는 무리수를 두었다. 어떤 면에서는 살짝 기대를 얹기도 했다. 그러나 장애를 이처럼 상실과 불행, 고통만으로 보는 낡고 얕은 인식에 편승한, 구닥다리 레퍼토리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기본 설정부터 의식의 퇴행이다. 기대는 접혔고 우려 쪽에 섰다.
드라마는 사고 시점에서 15년 후, 그녀와 그녀 사이의 달라진 삶을 조명한다. 임솔은 15년 전 자신에게 살라고, 살아보라고, 살아달라고 했던 ‘이클립스’의 보컬 류선재의 찐 덕후가 된다. 설레며 그의 콘서트를 보러 갔고, 그때 마침 그녀가 보낸 포트폴리오를 본 영화사에서 지금 인턴 면접시험을 보러 올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는다. 최신형 전동휠체어를 탄 임솔이 거리를 활보하며 저상버스를 이용해 영화사에 들어서는 순간 얼마나 설레었던지. 그녀가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장애 때문인 것 같아 반감은 들었지만), 영화 편집자의 꿈을 새롭게 꾸게 됐다. 그녀의 전동휠체어와 저상버스가 그 꿈에 도전하는 첫 번째 문을 두드리는 데에 동행했고, 이동의 자유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행동파, 본래의 그녀로 돌아오도록 한 동력임을 의미하는 듯해 반갑고 설레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서 그녀가 탄 휠체어를 본 직원은 면접도 보기 전에 “우리 회사 건물이 2층짜리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함께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한다. 미안해하는 어투였지만, 면접시험도 거부당하는 차별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그 뻔뻔한 낯짝에 소금을 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임솔은 이런 상황이 일상이어서 둔감해진 건지, 아니면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무언의 항변인 건지 그 자리에서 아무 경고도 시정요구도 못하고 나와서 (계단 때문임을 너무 소심히 말해 수긍으로, 심지어는 장애 탓으로도 들림) “에이, 아쉽네. 계단만 없으면 딱 붙는 건데” 한마디를 남기며 돌아선다. 결국 콘서트도 못 보고 전동휠체어는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어 멈춘다. 배터리를 충전할 데도 없어 그 자리에 서 있다. 마침 지나가던 류선재가 임솔 앞에 나타나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 이 드라마 최고의 아름다운 투 샷이 연출된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장면 ⓒ tvn
여기서 잠시 앞으로 돌려보면. 류선재가 나타나기 전 임솔은 어둡고 추운 거리에서 홀로 추위와 불안, 두려움을 견디며 친구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는 현실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불러도 대답 없는 너에, 대기시간이 보통 한 시간을 넘는 장애인 콜택시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겨울밤의 일상과 겹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상에, 그 너머 현실까지를 더듬으며 보는 시청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한편 타임슬립으로 사고를 모면한 시간 속에서 임솔의 장애는 사라지고 영화사에 취직해 커리어를 쌓아 인정받는 영화기획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접었던 영화감독의 꿈,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그 사람, 류선재 구하기, 무엇보다 장애 없애기까지,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이 모두를 이룬다. 이 과정에서 대중교통도 자유롭게 이용하고 계단도 뛰어다니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따려면 자격부터 조건부인 1종 보통 면허를 마음만 먹으면 딸 수 있는 몸이 됐다는 듯, “1종 면허도 땄네!”라며 신나 하는 그녀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뿐인가. 병원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임솔의 얼굴과 눈을 클로즈업시키는가 하면, 늘 두 다리로 다닐 수 있는 현재에 머물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당연시하며 내비친다. 그것도 자신의 장애로 인해 차별받던 현장에서는 굳게 닫혔던 입으로 말이다. 굳이 왜 이런 장면들과 내레이션을 넣었을까?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상기시키며, ‘그러니 장애는 불행의 씨앗’, ‘그러니 장애가 없는 것이 좋은 것, 우월한 것’이라고, 조금 심하게 말해 장애 소멸과 배척의 명분 만들기에 몰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불행, 고통에 기운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이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나 이 사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지, 이 유해한 인식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사회의 시선, 태도, 구조에서의 차별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살아갈 에너지를 얼마나 소진하게 만드는 것이며, 사회진출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 이것이 이 사회를 어떻게 퇴행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의도에서 장애, 비장애를 넘나드는 타임슬립을 선택했길, 그러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비장애인들의 삶이 이렇게 다른 사회가 과연 옳고 정당한 것인지를 무를 수 있는, 청춘들의 생각을 키우는 청춘 멜로물이 되었으면 했다. 대중문화, 그것도 TV 청춘멜로물에 너무 무리한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국 타임 슬립 업고 장애 왜곡과 혐오로 튀어버렸다. 장애는 불행이고 고통이니, 장애를 없앨 수 있으면 없애는 것이 좋고 없앨 수 있는 것이라 못 박는 장애왜곡의 도돌이표, 타임 슬립은 이런 장애극복주의나 에이블리즘을 흥미롭게 시각화해 대중의 관념에 안착시키는 도구였을 뿐이다. 장애를 가진 것이 불행이 아니라, 장애를 불행이라고 고통이라고 여기도록 몰아가는 사회이기에, 또 장애 친화적이지 않은 사회구조 탓이 아닌 오롯이 장애 탓으로만 돌려지는 사회이기에 불행이고 고통인 현실을 가리려는 의도로 의심될 만큼 말이다.
가장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은 뉴스에서 류선재의 사망 소식을 들은 임솔이 실내용 수동 휠체어(그것도 구형)를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었는데, 이 모습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워 보이는지. 보통 이런 경우 비장애 인물들은 직접 자동차를 몰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가지, 오롯이 두 다리로 뛰어가는 상황으로 연출되지 않는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도 요즘은 거리감과 현실성을 우선 생각해서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출할 때는 과거는 물론 현재도 현실성은 다 무시되고 오로지 장애를 가진 몸에 집착하며 조금 더 어려운 상황으로 ‘조금 더 힘겹게’, ‘조금 더 고통스럽게’를 외치며 요구하는 제작 현장이 많다는 것을 안다.
임솔에게는 최신형 전동휠체어가 있다. 거리감을 생각해 보고 다급함을 생각해 보더라도, 전동휠체어를 타는 게 상식이고 리얼한 연출이다. 상식과 리얼을 우선했더라면 장애는 결합이나 불행이 아니라, 다채로움으로, 개성으로,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곁에 달려와 줄 수 있는 연인, 친구, 동료로 비쳤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는 사회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 반대편에 선 듯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장애를 불행, 결함으로, 가족, 사회의 짐으로 몰아가면서, 장애의 자존감, 자부심, 자긍심과 같은 긍정의 에너지에 싹을 밟아 죽여 버리는, 드라마 속 흔하디흔한 말들과 이미지들이 이 드라마 속에서도 어김없이 반복 재연되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1974년 작품 <TV 붓다>가 생각났다. 작품 안에서 부다는 폐쇄회로 카메라로 촬영된 TV 화면 속에서 실시간으로 재연되는 자신의 이미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모습에 매료된 나르시시즘에 빠져든 것처럼. 사색과 깨달음의 상징인 그분도 무한 재연된 폐쇄회로 화면 속 자신의 이미지 루프에 갇힐 수 있다는 경각심을, 백남준 특유의 위트로 전하는 작품이다. <선재 업고 튀어>가 무한 반복하는 장애 부정과 장애 혐오, 장애 왜곡을 보셨다면 어떠셨을까? ‘선재 앓이’ 못지않게 ‘장애 혐오 앓이’ 중이지 않으실까? 반복되고 지속되는 영상언어와 이미지에는 이런 힘이 분명히 있다. 대중들이 이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지지 않나.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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