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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곁에 머무르는 IT기술

4차산업혁명과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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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재활병원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은 긴장의 시간이다. 학교를 졸업할 즈음 이제껏 받던 소아재활치료가 종결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재활로 넘어가야 하는데 치료를 제공하는 기관이 거의 없다. 한국의 아동·청소년 재활시스템은 대개 소아재활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자랄수록 갈 수 있는 재활병원이 점점 줄어든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병원을 전전하며 ‘재활 난민’ 생활을 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그마저도 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다. 이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몸과 마음이 변하지만, 그 몸과 마음을 돌볼 책임은 오롯이 가족의 몫이 된다.
 
중증장애아동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수술, 입원, 치료가 익숙한 아이들에게 병원은 삶을 연장하고 몸을 쓰는 법을 배우고 또래 친구를 만나는 공간이다. 부모들 또한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법을 익히고, 정보를 공유하고, 마음을 나눈다. 일정 나이가 됐으니 병원을 옮겨야 한다는 말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 이상 쌓아온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물리치료학자이자 생명윤리학자인 바버라 깁슨과 그의 동료들은 나이에 따라 일률적으로 장애아동을 이동시키는 제도를 “강제 퇴거(eviction)”에 비유했다1). 물론 병원에서 퇴원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일이 집을 잃는 것과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장애를 함께 고민하던 네트워크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점에서, 치료 종결은 집을 잃는 일만큼이나 한 가족의 삶을 뒤흔든다. 
 
의료는 살 만한 삶을 위해 몸에 개입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다. 장애학자들은 ‘좋은 삶’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의료의 힘에 대해 오랜 시간 논쟁했다. 이들은 장애를 의학적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저항하면서도, 장애를 가진 몸과 삶을 지탱하는 의료의 역할을 지지했다2). 장애를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료가 아닌 장애의 여정에 동행하는 의료를 꿈꾼 것이다. 특히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단계의 장애청소년들에게 의료는 몸과 마음의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3). 이런 의미에서 장애청소년을 소외하는 현 재활체계는 의료의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한다.
 
병원이 장애청소년 곁에 머물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할 방법은 없을까. 장애를 삶의 조건으로 잘 받아들이는데 재활치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내에 ‘청소년 재활’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20년 전에 이 고민을 시작한 병원이 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재활병원이다. 서울재활병원은 2006년 국내 최초로 장애청소년 재활 팀을 꾸렸다.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으면 제도를 만들고, 참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면 근거를 만들면서 팀을 키웠다. 하교 후 오후에 치료를 받는 청소년 낮 병동과 학교-가정-병원을 잇는 지역사회 재활프로그램이 이 팀에서 탄생했다. 지금은 정부도 참고하고 소아재활교과서에도 실린 시스템이다4). 세 명의 치료사로 시작한 청소년 치료 팀은 이제 한 건물 전체를 쓸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병원 하나, 팀 하나가 30만 명 가까이 되는 장애아동·청소년을 모두 맡을 수는 없다. 전국 각지에서 장애청소년이 오다 보니 치료를 받기 위해 짧으면 3년, 길면 5년 이상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필요한 의료적 돌봄과 전문가의 도움 없이 홀로 성장한다. 자꾸만 끊기는 치료, 긴 대기 시간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대기와 단절이 한정된 의료진 숫자와 치료 공간의 제약에서 생기는 문제라면, IT기술의 힘을 빌려 그 시간과 공간의 틈을 메꿔보기로 했다. 그렇게 서울재활병원은 직접 재활의료플랫폼을 만들기 시작했다.
 
실패하며 천천히 나아가는 앱 개발
서울재활병원에서 진료, 입원, 치료가 아닌 부서는 병원 밖에 있다. 환자를 위한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행정, 홍보, 연구 등을 담당하는 직원들이 병원 주변 골목으로 물러났다. 그중 재활의료플랫폼 업무를 맡은 기능연구센터 디지털재활치료혁신팀(이하 혁신 팀)은 병원 바로 옆에 딸린 조그만 사무실에 있다. 이곳에서 다섯 명의 직원이 앱을 개발한다.
 
혁신 팀을 이끄는 박준호 팀장은 2008년부터 청소년 재활 팀에 근무한 베테랑 물리치료사이다. 왜 청소년 재활치료를 택했냐는 질문에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재미있어 보여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07년 실습을 위해 서울재활병원에 방문했던 그는 청소년 재활치료실에서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장애를 보았다. 힘들고 고달프기만 할 것 같았던 치료는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과 치료사는 서로 농담을 나누고 때로는 속 깊은 대화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장애청소년과 연결되는 일에 매력을 느낀 그는 그다음 해 청소년 재활 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한때는 “정말 치료를 잘하는 치료사”를 꿈꿨다.
 
지금 박준호 팀장은 잠시 치료를 줄이고 앱을 만들고 있다. 스스로를 “IT와 거리가 되게 먼, 컴퓨터 연결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코딩을 직접 배워서라도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치료사로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저희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였다. 자신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5년 이상 기다리는 아이와 부모에게 더 기다려 달라는 대답을 덜 하고 싶었다. 또한 장애청소년이 병원에만 묶여 있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재활하는 데 쓰기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영화관에도 가는 일상을 지지하고 싶었다. 그것이 장애청소년들을 만나면서 그가 배운, 그리고 꿈꾸게 된 장애를 가진 삶이다. 그는 기약 없이 기다리는 삶과 병원만 있는 삶 사이에서 다른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혁신 팀으로 옮겼다.
 
장애청소년과 가족과 의료진을 잇는 재활 앱. 병원에 꼭 와야 할 때와 오지 않아도 될 때를 함께 논의하고,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의료 정보를 제공하는 앱. 간단해 보이지만 구현하기는 어려운 기술이다. 장애를 이해해야 하고, 돌봄을 이해해야 하고, 재활의학을 이해해야 한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당사자들이 무엇을 원할지, 어떤 장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장애와 재활에 대해 잘 모르는 개발자에게 외주를 맡긴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박준호 팀장과 동료들은 ‘시민 개발’ 방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시민 개발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최소한의 코딩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개발 방식이다. 전문 IT기업이 만든 앱처럼 화려한 인터페이스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현장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에 그때그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혁신 팀에서 일하는 다섯 명 중 한 명의 전문 개발자를 제외한 네 명은 모두 이전에 개발 경험이 없는 현직 병원 직원이다. 원무과, 작업치료, 물리치료, 전산을 담당했던 이들이 재활의 전 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한 장 한 장 직접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재활병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장애청소년과 가족이 잘 쓸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료를 안다고 해서 장애를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일은 기술을 통해 장애가 재활에 접속하는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박준호 팀장은 프로토타입을 써 본 환자들의 반응이 좋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환자들은 생각보다 인터페이스에 접근하기 어려워했고, 의료진이 제공한 정보를 일상에서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장애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앱 사용 과정을 지켜본 혁신 팀은 “정말로 환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개발을 다시 하자”고 결정했다. IT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개발을 진행하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는 생애 동안 계속 남아 있거든요. 기능이 더 좋아질 수는 있지만 장애가 없어지지는 않아요. 장애가 이어지는 거라면, 그 삶을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그 삶의 곁에 있기 위해 그의 팀은 더 많은 장애당사자를 초대해 의견을 듣고, 더 많이 실패하고, 그러면서 천천히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 서울재활병원 기능연구센터
 
장애 곁에 머무르는 의학과 기술
좋은 돌봄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바꾸려는 마음과 행동에서 출발한다. 잘 돌보는 사람은 타인을 잘 보고 듣는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정하여 도움을 제공하는 대신, 직접 묻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내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돕는 만큼, 그 사람도 내가 장애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돌보는 이가 장애를 가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장애를 가진 삶을 산다고 해서 다른 장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 장애를 돕기 위해 개발됐던 수많은 기술이 실제 삶에서 쓰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은 기술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자신을 기꺼이 바꿀 역량을 가진 사람은 적다. 장애를 배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만든 기술은 장애를 돌보는 데 실패한다.
 
서울재활병원의 디지털재활플랫폼 앱 개발 사례는 장애 곁에 머무르고자 하는 의학과 기술이 띨 수 있는 한 형태를 보여준다. 중학생에 접어든 장애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미래를 함께 준비하고 싶어 청소년 재활치료를 디자인했고, 그 치료를 병원 밖으로 확장하고 싶어 앱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는 일도 많지만, 그 시행착오 속에서 병원 안 삶과 병원 밖 삶을 조율하는 법을 배운다. 결국 의료와 기술도 어떤 삶을 만들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 고민에 장애당사자와 가족과 의료진과 공학자가 모두 참여할 때, 장애를 살만한 삶의 조건으로 만드는 의료와 기술을 생각할 수 있다. 
 
 
▲ 강미량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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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Gibson, B.E., King, G., Kingsnorth, S. et al. 2014. “The ‘placement’ of people with profound impairmentsacross the lifespan: re-thinking age criteria.” BMC Medicine. 12, 83. https://doi.org/10.1186/1741-7015-12-83.
[2] 관련 논의로 다음을 참고.
수전 웬델,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2013.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그린비.
앨리슨 케이퍼, 이명훈 옮김. 2023.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불구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학과 상상력. 오월의 봄.
문영민. 2024. “장애인 건강 상태의 재구성: 이차적 건강 상태 경험에 관한 질병 내러티브 분석.” 보건사회연구. 44(1). 325-350.
[3] Mauldin, L. 2016. Made to Hear: Cochlear Implants and Raising Deaf Childre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4] 서울재활병원. 2024. 서울재활병원 ‘미래비전계획서’. 브라이언임팩트. https://brianimpact.org/organizer/521/
[5] Leah Lakshmi Piepzna-Samarasinha. 2018. Care Work: Dreaming Disability Justice. Arsenal Pulp Press.
작성자글. 강미량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연구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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