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우리답게 살게 하는가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 영화 <멈출 수 없는 말> (I swea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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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멈출 수 없는 말’ 포스터 ⓒGraeme Hunter
'멈출 수 없는 말'
영화 <멈출 수 없는 말>. 제목에 이끌려 보게 된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니 원제 ‘I swear’(‘정말이야’, ‘맹세해’)가 담지 못한 근원적인 의미까지 품은, 보기 드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존 데이비드슨’은 실제로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투렛 장애를 알리기 위해 시민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투렛 장애를 가진 청년들의 멘토 활동을 하고 있는 인권 활동가다. 영화 <멈출 수 없는 말>은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영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극으로 옮길 때 흔히 선택하는 신파나 한계를 이겨낸 ‘극복’의 서사를 영화는 의식적으로 경계한다. 그저 한 사람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멈출 수 없는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과정과 그 과정이 기약 없는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음을 비춘다. 영화의 이러한 시선과 전개를 단순히 ‘조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어쩔 수 없는 것’, ‘멈출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담겨 있다. 다름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명제 말이다.
달라지지 않는 시선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존’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목과 눈이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주먹을 날리며 욕설이 튀어나온다. 존이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자신조차 그런 자신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학교와 가족, 이웃은 그런 그를 사춘기의 반항심이나 엇나감으로만 몰아가며 문제아 취급하고, 이상하고 위험한 아이로 몰아세운다. 친구들은 대놓고 그를 피하고, 그의 행동을 따라 하며 조롱하거나 혐오의 말들을 쏟아낸다. 존이 참다못해 싸움이라도 벌이면 교장 선생님과 부모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존의 잘못이라 몰아붙인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행동과 말이 세상에서는 혐오와 조롱, 배척과 차별의 이유가 되고, 심지어 잘못이 된다. 그것도 갑자기, 내 편 하나 없이 홀로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밝고 자신감 넘쳤던 소년은 점점 어두워지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감을 잃어간다. 결국 존은 병원을 찾고, 투렛(Tourette disorder, 투렛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의사는 존이 보이는 행동과 욕설은 본인의 의지로 멈추거나 조절할 수 없다고 설명하며 약이 도움이 될 거라 한다. 이런 진단을 받았음에도 존은 여전히 이상하고 위험하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는 자퇴를 요구하고, 이웃은 혐오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가족 역시 존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약을 먹으라고, 행동을 멈추라고만 다그친다. 지금 존에게 ‘멈추라’는 다그침은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과 동의어일 것인데 말이다.
지금 존을 정말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증상 그 자체보다, 자신의 의지로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답답함과 억울함이지 않을까. 다르다는 이유로 피하고 숨기고 혐오하며 결국 밀어내는 것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의 의지로 멈출 수 없다는데, 왜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낯선 것을 터부시하며 혐오할까. 급기야는 ‘고쳐야 할 것’이라며 다그치기까지 한다. 무엇이 이 편협한 시선을 당연시하고 옳다고 믿게 하는 걸까. 인간의 유지 본능, 즉 ‘정상’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 근원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이유가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존은 ‘정상’이라 말하는 그들의 방식과 모습에 자신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안전을 갖는 것은 생존 문제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멈추어야 했고 고쳐야 했던 것은 ‘존’의 행동과 욕설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었을까.

▲도티와 존의 모습 ⓒGraeme Hunter
'인정하다'가 가진 힘
이후, 존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나는 ‘인정하다’라는 말이 가진 의미와 그 힘을 보게 된다. 간암으로 시한부 진단을 받은 친구의 엄마 ‘도티’에게 뜬금없이 “넌 암으로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존. 돌아오는 것은 주먹도 욕설도 아닌, “괜찮아. 몇 달 동안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어.”라는 대답이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틱과 욕설 때문에 “죄송해요.”라는 말을 달고 사는 존에게 도티는 말한다. “이 집에는 규칙이 하나 있어. 어쩔 수 없이 행동한다면 절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녀는 존에게 약을 끊는 것과 독립을 권하면서, 복지 센터의 일자리를 소개한다. 면접을 보러 간 존은 그곳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난다. 온갖 욕설을 하고 주먹질까지 하는 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해야 할 업무를 차분하고 꼼꼼하게 설명하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주는 관리인 ‘토미’다. 존은 묻는다. “틱과 욕설이 괜찮으세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에도 이렇다. “무슨 틱? 무슨 욕설?” 이 장면들이 마치 판타지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의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흔히 경험해 볼 수 없는 반응들이라서.
그들이 보여준 태도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존의 행동을 고쳐야 할 것이나 사과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런데 이 ‘인정’이 가진 힘은 컸다. 존은 더는 자신의 틱과 욕설의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지 않아도 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할 이유도 줄어들었다. 늘 긴장하고 경직되어 있던 존은 편안하게 웃기 시작한다. 잔뜩 위축되어 상대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그는 자신감을 되찾고,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마음껏 표현하기 시작한다. ‘인정’이, 존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게 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어떤 사람들은 연기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만 묻죠. 왜 그런 연기를 할까요? 굳이 쇠 지렛대에 맞서면서까지요. 학교에서 온갖 굴욕과 조롱을 당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진학시험을 보는 것조차 거부당해야 하는데 말이죠. 연애는 꿈도 못 꿔요. 세상에 누가 그런 연기를 합니까.” 성희롱범으로 몰려 법정에까지 선 존의 장애를 증언하는, 직장 상사 토미의 말이다.
나는 역으로 묻고 싶다. 당신이라면 치욕스런 범행을 저지른 파렴치한으로 몰리는 그런 연기를 하겠느냐고.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왜 존의 행동에는 연기라고 하고, 비아냥거리며, 어떻게든 밟아버리려 할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낯섦을 틀린 것, ‘정상성’에서 이탈한 이상하고 위험한 것으로 몰아 어떻게든 정복하려는 인간의 오만함. 그런 습성이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기는 존재에게 더욱 극대화되는 것은 아닐까.
토미는 덧붙인다. “그는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착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예요. 차도 아주 잘 끓이고요.” 이 대목에서, 또 법정을 나서는 존에게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에게 “나와 함께 돌아가서 배수관 청소를 도와줄 겁니다.”라는 토미의 대답에서, 나는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를 되뇌었다.
토미에게 존은 그저 잘하는 것도, 서툰 것도 있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직장 동료이며, 그가 가진 투렛은 누구나가 가진 다름 가운데 하나일 뿐, 존을 규정하는 전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계획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 바로 그 평범함에서 읽히는, 인정과 지지, 그리고 다정함이 지금의 존을 그답게 지키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존과 토미의 만남 ⓒGraeme Hunter
앞서 말한 믿음과 안전을 얻는 데 약이나 치료가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엄마가, 세상이 바라는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묘약이 될 수는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이처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고 어떻게 대하는가이며, 그 태도에는 사회의 인정과 그로 인해 설계되는 구조가 영향을 미친다. 그런 환경 속에서만이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존 역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다움을 지키며 평범함과 맞닿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S. 익숙함이 만든 오류
법정을 나서는 존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쏟아낸다. 늘 존의 말을 기다리고 들어주었던 도티와 토미가 평소와 달리 존이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고, 자신들이 대신 답한다. 그동안 도티와 토미는 존의 말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말할 권리를 존중했던 사람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티와 토미의 가장 큰 미덕이고, 그 미덕이 이 영화의 중심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장면이 더 아쉽다. 보통 언어장애가 있거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대신해 부모나 주변 사람이 인터뷰에 응하고, 정작 당사자의 말보다 그들의 말이 앞서는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나는 이런 장면이 늘 불쾌했다. 이 영화에서, 이 장면에서 도티와 토미가 그들답지 않게 왜 이럴까? 영화적으로 클라이맥스를 살리기 위한 극적 연출이었을까? 그랬다면 오히려 존이 직접 대답하게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익숙함’에서 찾는다. 표현언어를 음성언어로 한계 짓는 익숙함, 느리고 전달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말은 영상매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말보다 주변 사람의 말을 앞세우는 익숙함, 무엇보다 관객에게 익숙한 영화 문법 말이다. 하지만 이 익숙함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오류를 낳아왔던가. 그 오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차별의 시작이 되었던가. 우리가 정말 극복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름을 바라보는 우리의 익숙함이 아닐까.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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