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아이, 피고인이 된 부모
발달장애인과 가족의 생존권
본문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의 돌봄 부담이 코로나19로 인해 가중되었다. 24시간 돌봄으로 인한 피로와 번아웃이 발달장애 가정을 스쳤고 올해만 일곱 가정이, 두 달 사이 네 가정이 비극을 맞이했다. 2022년 3월 2일, 수원에 사는 40대 여성이 7살 아들을, 같은 날 시흥에 사는 50대 여성이 20대 딸을 살해했다. 같은 해 5월 23일, 인천 연수구에 사는 60대 여성이 30대 딸을, 같은 날 서울 성동구에 사는 40대 여성이 6살 아들을 살해했다. 가해자는 모두 장애아동의 양육 돌봄을 전담하던 어머니들이다. <함께걸음>은 발달장애 가족의 비극을 재조명하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 우리 사회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세 가지 코너에 걸쳐 짚어보고자 한다.
“죽은 딸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한 기자의 질문은 딸을 살해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다 미수에 그친 어머니를 향했다. 그녀는 20년간 발달장애가 있는 딸을 홀로 키워오다 최근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신변을 비관해 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미수에 그쳐 경찰에 자수했다. 그 기자의 질문은 적절한 물음이었을까.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돌봄의 무게는 약 25만 명에 달한다. 무엇이 벼랑 끝에 몰린 발달장애 가족을 법정에 서게 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발달장애인의 부모로 산다는 것
"처음에는 자녀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힘들었다. 애써 현실을 부정도 해보고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죄책감에 치료와 교육에 더욱 매달린다. 결국 수년간 지속해오던 일을 그만뒀다. 그 후 아이의 인생이 곧 내 인생이 되었다. 아이의 장애를 위해 온 신경을 다 했다. 이 삶을 긍정도 해보고 적응도 해봤다. 특수교육과 돌봄을 지원하는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고 치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려니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점점 포기 하게 되는 것도 많았다. 그런 노력에도 아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이의 몸은 커져만 가는데, 나는 이곳저곳 온몸이 더 아파 만 간다. 내 아이지만 나도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있다. 그러니 남한테 나만큼의 돌봄을 바라기도 쉽지 않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지쳐가는 것 같다. 마음 놓고 아프기조차 두렵다. 걱정만 커진다. 내가 없는 세상에 남겨질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심신이 피폐해지는 일이다. 모든 것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 같아 우울하다.”
< 발달장애 부모 박00•강00 인터뷰 中 부분 발췌〉
지난 7월 1일 서울 삼각지역에서 열린 중증•발달장애인 참사 T4장례식에 참석한 한 시민은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발달장애 가족의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했다.
김00 "부모가 오죽하면 그랬겠냐고 그 마음을 사람들이 아무리 헤아려본다고 해도 그 부모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 겪을 고통에 1%만큼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 선택은 자신이 없으면 더는 자녀에 대한 돌봄이 지속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이 내재된 거죠. 이게 ‘사회적 타살’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는 장애아동에 대한 ‘돌봄의 다양한 경로가 부재한 현실’이 이번 비극의 시작임을 지적했다. 발달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나 지원이 그들에게 적절하게 제공되지 않았고 그럴만한 체계조차 없었다. 누구보다 그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삶의 양식은 모두 다르더라도 발달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부모들에겐 공통적인 소망이 있었다. ‘아이보 다 자신이 딱 하루만 더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만큼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질 장애자녀에 대한 걱정이 큰 탓이다. 부모의 부재에도 발달장애인 자녀가 온전한 사회구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국가가, 지역사회가 강력한 의지를 담아 보여줄 순 없었을까. 저마다의 사정으로 돌봄을 포기한 가족을 대신해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을 품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사례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어준다. 그 사건 이후, 피해 아동은 가해자인 부모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다. 우리 사회의 돌봄 책임이 여전히 부모에 게만 떠넘겨진 탓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직 그렇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요구,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발달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부모의 힘든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일에는 더딘 걸음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발달장애인’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2000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고 시행되면서부터이다. 2015년이 되어서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2018년부터 ‘발달장애인 생애주기별 지원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2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뿐이며, 무엇하나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 없다. 발달장애를 가진 그들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살아가고, 노년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생애 한 주기도 파악되고 있는 것이 없다.
발달장애 가족들은 국가의 발달장애인에 대한 돌봄의 부족과 지원체계의 부재가 이러한 비극을 낳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 2차 발달장애인 생애주기별 종합대책’의 수립과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를 실시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일찍이 발달장애인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인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미국은 1963년 발달장애인에 대한 실태조사와 함께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했다. 그 노력으로 「발달장애지원 및 권리장전법(Developmental Disabilities Assistance and Bill of Rights Act; DD Act)」이 제정되었다. 미국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지원체계 및 서비스는 ‘당사자 중심’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발달장애가 있는 개인과 그 가족을 위한 가정 및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를 지원하는 NASDDDS(National Association of State Directors of Developmental Disabilities Services)와 56개 주에는 발달장애에 관한 국무위원회(DD Councils)를 설치했다. 의회 구성원 60%는 발달장애가 있는 개인 또는 그 가족으로 구성되며, 발달장애인의 요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5년마다 통합 및 포용을 촉진하기 위한 5개년 행동계획을 개발한다. 또한, 미국은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개별화된 서비스를 평생에 걸쳐 지원해준다. 미국의 특수교육법(IDEA)에 따라 특수교육을 받는 3세에서 21세의 모든 장애학생에게는 반드시 '개별화 교육프로그램 (IEP:Individulized Education Program)'이 존재한다. 장애학생 개개인에게 적합한 학습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학생의 현재 학업 성취도, 교육이 이루어지는 환경, 장소, 제공되는 특수교육과 관련 서비스에 대한 전문가 회의를 바탕으로 학교 관계자들과 부모가 한 팀이 되어 장애학생을 위한 IEP를 계획한다.
발달장애 아동이 학령기에서 성인기로 전환될 때는 Regional Center를 통해 '개별 전환계획'을 세워 지역이나 그룹홈, 직업재활 기관과 연계한 서비스가 제공된다. 이곳은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를 조정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발달장애가 있어도 일상에서,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나서서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다.
발달장애 가정의 비극, 우리 사회가 반성해보아야 할 문제는?
한국 사회는 유독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아동에 대한 부모의 범죄는 가볍게 다뤄지고 있으며 처벌도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 자녀를 살해한 발달장애 가정의 범죄도 마찬가지다. 지난 5년간 발달장애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미수에 그친 사건은 30여 건에 달한다. 가해 부모 대부분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생명에 대한 권리는 동등하며, 피해 아동이 별개의 인격체로서 독립하고 생존하는 존재로서, 아무리 부모라고 할지라도 임의로 자녀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처분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으면서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지원체계의 부재가 부모의 돌봄 부담을 가중한 것을 감형 사유로 참작하는 한편 “스스로 자식을 살해하였다는 기억과 그에 대한 죄책감이 그 어떤 형벌보다도 무거운 형벌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이를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원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자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의 선택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발달장애인의 죽음도 한 생명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목숨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발달장애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동반자살’이 아닌 부모의 극단적 선택에 의한 자녀들이 희생이 강요된 ‘비속살해’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재판부는 20대 친딸을 살해한 50대 여성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22세인 피해자는 2018년부터 홀로 버스를 타고 장애인 시설로 출근해 월 100만 원의 소득을 벌어 왔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또래의 연인도 있었다. 법원은 “피해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고 사랑했을 피고인의 손에 급작스럽게 삶을 마감한 피해자가 그 과정에서 겪었을 고통을 가늠하기 어렵다”며 양형의 이유를 밝혔다.
장애인은 죽어 마땅한 것인가?
발달장애 가족의 비극을 조명하는 언론 보도나 대중들의 인식도 문제가 된다. 그들은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부모가 직면하는 내면적 어려움에 집중하며, 부모의 살인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바쁘다. 유독 ‘장애’라는 타이틀이 범죄 영역에 붙으면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가해자에 대한 동정은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낼 여지가 있다. 이는 장애아동에 대한 부모의 살인을 정당화하여,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것이 마치 사회적 짐인 것처럼 인식되게 할 가능성을 높인다. 장애아동을 양육하며 그 부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떤 한계점에 도달하여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그 원인을 찾고 분석하다 보면 결국 자녀의 ‘장애’에 그 원인을 두게 된다.
우리는 발달장애 가정의 비극을 달리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죽음에 대한 원인은 자녀의 ‘장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장애로 인한 양육의 ‘고통’에 있다. 아동의 발달장애가 그 가족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부족이 발달장애 아동을 양육하는 가정에게 얼마나 많은 부담을 안기고 있는지에 집중되어야 한다.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가정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부모가, 지역사회가, 국가가 그 방법을 함께 배우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음을...
작성자글과 사진. 이은지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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