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여성, 생존권 그리고...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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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 다시 보기
글과 사진. 함께걸음미디어센터
월간 <함께걸음>은 오래 전 장애인권운동의 생생한 기록들을 찾아, 지금 현재의 관점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함께걸음> 다시 보기’ 연재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디지털 아닌 필름카메라 시절의 사진들을 지면 촬영으로나마 복구하고, 색 바랜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장애인권운동사(史)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맞춰가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함께걸음> 다시 보기’는 <함께걸음> 32년 역사의 PDF 전환작업을 위한 사전준비과정으로, 장애인권의 암흑기였던 20세기까지 되돌아보는 뜻깊은 발자취를 한 걸음씩 남겨놓겠습니다. 연재의 첫 순서는 대한민국 장애인권운동의 상징인 인물, 故 최옥란 열사의 마지막 절규와 몸부림을 취재했던 2002년 5월호 20~23면의 내용입니다.
2002년 5월호 20~23면
최저생계비 현실화 투쟁 벌였던 뇌성마비 장애우, 故 최옥란 씨의 삶
글. 이나라 기자
어느새 추운 겨울이 벌써 성큼 다가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12월 3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하여 텐트를 치고 농성을 계획하고 있는 최옥란입니다. …<중략>… 저는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원을 지급했습니다. …<중략>… 제가 지불해야 하는 약값만 해도 26만원을 넘는데… 아파트 관리비만도 16만원인데… 도대체 나보고 26만원 가지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그러면서도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실무과정에서 착오가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략>… 저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 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 故 최옥란 씨가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결의문 중에서 -
“후배장애우들만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작년 12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하 기초생활보장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한겨울의 명동성당에서 텐트 농성을 벌였던 뇌성마비 장애우 최옥란 씨가 지난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최옥란 씨는 2월 20일 경 동사무소에서 수급권 재신청을 위해 소득 및 재산신고를 하라는 편지를 받고 과산화수소와 수면제 20알을 삼키고 자살을 기도해, 장이 녹아 붙고 식도와 위가 손상되는 등 중태에 빠졌으나 한동안 상태가 호전, 소생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심신이 극히 쇠약한 상태에서의 자살 시도는 그렇지 않아도 떨어진 면역력에 치명타를 가했던 모양이다. 3월 26일 새벽, 갑자기 외부 반응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이를 구하기 위해 의료진이 발 벗고 나섰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이의 어머니도 눈물을 머금고 산소마스크를 벗겨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우한성 씨는 “입원 당시 아들이 눈에 선해서 미치겠다는 말과, 나는 이렇게 되었지만 장애 동료들은 살기 좋게 편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최옥란 씨의 유언을 전했다.
최옥란,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찬바람이 몰아치는 명동성당 앞에서 한 여성장애우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면서 매일같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함께걸음>에 짧게 소개되면서였다. 내가 담당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거동할 수 있는 1급 장애우, 서른일곱의 이혼녀, 정부에서 생계비를 수급 받는 실업자라는 3중고를 짊어진,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최옥란 씨가 자살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급기야 3월 26일 그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한줌 뼛가루로 스러져간 최옥란 씨의 절망적인 사연은 서민대중을 위한다는 정부의 복지정책이 장애당사자의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이는 아들을 기르고 싶었지만, 극빈자이기 때문에 양육이 불가능해지자 노점상을 했다. 그러나 노점상 수입이 조금 생기자 소득이 있으므로 생계비 수급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위협을 받아 노점상도 그만두었다. 하지만 정부는 극빈장애우의 처지를 외면하고 일률적으로만 생계비를 지원했다. 그이는 최소한 60만원은 있어야 장애우가 살 수 있다며, 불합리하게 책정된 생계비에 대한 위헌신청을 내고, 지난겨울 명동성당에서 일주일 동안 홀로 천막농성을 하다가 결국은 희망 없는 세상을 등졌다.
“아들과 함께 살려면 최저생계비는 포기해야 한다니,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살란 말입니까.”
전동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최옥란 씨. 그러나 그이는 보통 장애우가 아니었다. 길지 못했던 생애 동안 그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향해 온 몸으로 호소하고 저항한 투사였다.
↑ 지난해 12월 세종로청사 부근에서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증언하며 눈물짓고 있는 故 최옥란 씨
그이가 장애우 인권운동에 뛰어든 것은 지난 87년 가을. 평범한 장애우였던 그이는 뇌성마비장애우 모임에 가입하면서 장애우복지를 위해서는 장애우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뇌성마비장애우연합인 ‘바롬’ 설립의 주역이 됐다.
그 후 1988년에는 장애문제연구회 ‘울림터’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에는 ‘장애우 고용촉진법 제정과 장애우 복지법 개정을 위한 공대위’에 참여하는 등 장애운동을 하는 현장에서 그이가 빠지는 법은 없었다.
특히 2001년 1월에는 장애우이동권 쟁취를 위한 지하철 선로점거 시위를 이끌었고, 작년 12월에는 그 추운 겨울날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주장하며 명동성당 앞 텐트 안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투사와 같은 최씨의 모습 뒤에는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어쩔 수 없는 모성이 있었는가 보다.
최옥란 씨는 10년 전 동갑내기 장애우 김모 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행복한 삶을 잠시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남편과 이혼 후 아들과도 헤어지면서 최 씨의 삶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평소 그이는 가족들에게 “아이랑 살고 싶다. 혼자 살기는 너무 외롭다”며 항상 아이를 그리워했었다고 한다.
그이의 전 남편 김 씨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아들의 양육권을 가지는 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 남편이 지난해부터 아들과 만나는 일을 가로막아 그이를 힘들게 했다.
우선 그녀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부양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계천 벼룩시장에서 잡화를 파는 노점을 벌이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700만원을 모았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생계에 보탬이 되리라는 기대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수급 신청을 했고, 노점상을 하며 영구임대아파트 관리비 등을 충당했다.
↑ 지난해 12월 5일 최옥란 씨와 시민단체 회원들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로 행진하던 모습
그러나 이를 시샘한 주변 사람이 “노점상을 해 경제력도 있는 사람이 왜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냐”면서 광명시청에 직접 진정을 해, 최씨는 생계비 수급과 노점상 유지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급기야 광명시는 “월 소득 33만원이 넘는 사람은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을 들이밀며 양재택일을 강요했다. 그이는 결국 좌판을 포기하고 생계비 수급을 선택했지만, 지원금 26만원으로는 치료비 20만원과 아파트 임대료 16만원도 충당할 수 없어 매달 30여만원의 빚을 쌓아가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이의 여동생 옥희(33) 씨는 “죽기 전 언니의 심경이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다. 아들을 되찾으리라는 희망도, 자기 한 몸 추스를 여유조차 없는 상황에서 언니는 절망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니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난 뒤, 언니의 일기를 읽으며 평범하게 자식을 낳아 키우며 살기를 원했던 언니의 소망이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뇌성마비 중증장애우의 몸으로 그토록 장애우의 권익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해 왔던 그이였지만, 가난으로 모성마저 포기해야 하는 현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리라. 결국 그이는 인간답게, 자식과 함께 살고픈 모정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 지난 3월 28일 경찰에 의해 도심통과가 저지된 고인의 운구차
농성에 들어가기까지
최씨는 작년 12월 3일부터 6일간 한겨울의 명동성당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텐트 농성을 벌였다. 그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한 달 약값도 되지 않는 돈을 주면서 이래저래 생색만 내는 국가에 26만원을 반납하고 말겠다”면서 이 나라의 최저생계비 정책을 성토했었다.
이후 그녀는 목숨과 같은 돈 26만원을 그녀를 조롱하듯 바라보는 국가의 면전에 내팽개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정부청사에 들어가기 위해 경찰과 싸우면서 길 위에 드러눕는가 하면, 급기야는 보건복지부 장관 집에 26만원이 든 돈 봉투를 내던지고 돌아서기도 했다.
또 “현행 최저생계비에 기초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보장하지 못하고 최저생계 보장이라는 법 취지에도 위배된다”며 헌법소원을 제출했으나, 사법부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생의 희망을 내던지고 말았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도 순탄치는 못했다.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회단체들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3월 28일 ‘민중복지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명동성당과 세종문화회관 앞을 거쳐 장지인 벽제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생전에도 그러했듯 고인을 그렇게 막아서던 경찰은 또 다시 ‘운구차의 도심 통과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미 고인이 된 그녀의 마지막 길을 막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유족과 장례위원회측은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벽제화장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장애우이자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야말로 차별과 차별의 공집합 속에서 차별의 최전방에서 살다가, 그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삶을 내던져 버린 故 최옥란 씨. 우리는 최옥란,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그이의 육체적 사인은 ‘심장마비’였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슬프고, 외롭고, 소외된 생을 살아온 그이의 삶을 이 세상에서 몰아낸 것은 결국 ‘힘없는 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외면’이었기 때문이다.
↑ 4월 28일 종묘에서 노제를 지낸 후 거리행진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경찰의 진압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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