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주유소 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어야… 인권위, 정부에 의견 표명
호출 버튼·직원 지원체계 마련하고, 단차·회전공간 등 접근성 기준 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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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주유소 10곳 중 6곳이 셀프주유소로 전환되며 무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장애인운전자가 겪는 주유 장벽은 오히려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창호)는 장애인이 셀프주유소를 이용할 때 실질적인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가 정책적·제도적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번 사건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인이 2025년 9월 제기한 진정에서 출발했다. 진정인은 차량을 주유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데, 직원이 없는 셀프주유소가 늘어나면서 주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장애인의 셀프주유소 이용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상 주유소는 편의시설 의무 설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복지부는 장애인 신규서비스 개발 공모 사업을 통해 경기도 용인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 '우선 배려 주유 서비스 사업'을 추진하는 등 편의 증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명했다.
인권위는 진정인의 구체적인 피해 사실이 특정되지 않아 해당 진정 자체는 각하했으나, 셀프주유소 급증에 따른 장애인의 이동권 제약 문제를 구조적인 접근권 공백으로 판단하고 정부 부처에 선제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 자료에 따르면 2025년 12월 기준 전국 셀프주유소는 6,240곳으로 전체 영업 주유소의 약 59.8%를 차지한다. 셀프주유소는 2023년 전체 영업주유소의 절반을 넘어선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다. 같은 시점 경찰청 자료 기준 운전면허를 보유한 장애인은 약 18만 명에 달한다.
인권위는 셀프주유소에서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이 단순히 무인주유기의 화면을 조작하기 어렵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봤다.
차량을 적절한 위치에 정차한 뒤 주유기까지 접근하고, 화면과 결제 단말기를 조작해야 한다. 이후 주유건과 호스를 들어 차량의 주유구에 연결하고 주유구를 열고 닫으며 유종을 선택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유기 주변의 접근 공간, 화면과 결제 단말기의 높이, 주유건과 호스의 위치 및 조작 가능성 등 다양한 물리적·정보적 장벽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장애인이 스스로 주유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오류·안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시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지도 중요한 접근성 요소로 제시됐다. 인권위는 단순히 기기의 화면이나 결제 단말기를 조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주유소에 진입해 차량을 정차하고 주유를 완료하는 전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최근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시행령에 무인정보단말기, 즉 키오스크에 대한 접근성 규정이 마련됐지만, 이것만으로 셀프주유소의 장애인 접근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셀프주유소에서 발생하는 장벽은 무인주유기의 화면이나 결제 기능뿐 아니라 주유소 진입과 차량 정차 위치, 주유기 접근 공간, 주유건과 호스의 조작, 주유구 개폐, 유종 선택, 안전 상황에서의 의사소통, 도움 요청 방식 등 물리적·정보적·인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음식점과 금융기관, 교통시설, 공공서비스 등 일상생활 전반에서 무인화·자동화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과거 직원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보완되던 장애인의 이용상 어려움이 자동화된 환경에서는 새로운 접근 장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서비스 제공 방식이 변화하더라도 장애인이 실제로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접근성을 점검하고, 새롭게 발생한 장벽을 제거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위가 보건복지부장관과 산업통상부장관에게 제시한 개선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장애인이 필요한 경우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셀프주유소에서 종사자의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체계를 구축하고, 호출 버튼이나 인터폰 등 지원 요청 설비를 설치하며, 장애인 급유 지원에 관한 운영 지침을 마련해 사업자에게 안내하라는 것이다.
실제 사례도 있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셀프주유소 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임산부 등 이동약자가 주유기에 부착된 QR코드를 휴대전화로 스캔하면 주유소 직원에게 자동으로 연결돼 직원이 직접 주유를 지원하는 ‘우선 배려 주유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인권위는 이 사례를 통해 셀프주유소의 운영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종사자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둘째, 장애인이 가능한 범위에서 무인주유기를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설치·운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인권위는 단차 없는 바닥, 충분한 회전 공간, 직접 조작할 수 있는 높이의 화면과 결제 단말기, 주유건과 호스의 위치 등 접근성 요소를 반영한 설치·운영 기준과 접근성 검증 기준을 마련해 시행할 것을 제시했다.
인권위는 장애인의 접근성을 개별 주유소 사업자의 자율적인 배려에만 맡길 경우 지역이나 사업자에 따라 이용 가능한 서비스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셀프주유소가 전체 영업주유소의 약 60%까지 확대된 만큼 일정한 수준의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통적인 정책 방향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하고 있으며, 재화·용역 제공자가 장애인에게 비장애인과 실질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수준의 편익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또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는 장애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고 정당한 편의가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적·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
인권위는 이러한 법적·국제적 기준을 바탕으로, 무인화·자동화의 확대가 장애인의 서비스 이용 기회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물리적·정보적 접근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이용이 어려운 경우에는 적시에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고 제공받을 수 있는 인적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셀프주유소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를 넘어, 무인화·자동화가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접근성의 공백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셀프주유소처럼 이미 보편적인 서비스 방식이 된 영역에서 장애인의 이용을 개인의 도움 요청이나 사업자의 선의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실질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다.
작성자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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